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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메이커]프로야구 두산 前감독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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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메이커]프로야구 두산 前감독 김인식

입력
2003.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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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좋다'는 소릴 듣는 사람에게서는 프로 냄새를 느끼기가 힘들다. '사람 좋다'란 평의 뉘앙스는 '유능'보다는 '무능'에 가깝기 마련이다. 스포츠계에서 소위 '용장' '지장'으로 분류되는 지휘관보다 '덕장'이 성적을 잘 내는 경우가 드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인식(56·金寅植) 감독은 프로야구 명문 팀 두산을 9년이나 지휘했다. 해태를 18년간 이끈 김응용 감독(삼성)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다. 성적도 첫해인 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비롯해 99년 페넌트레이스 승률 1위, 2000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 4년 연속(98∼01) 포스트시즌 진출 등 상당히 괜찮았다.김감독은 야구계에서 유명한 호인(好人) 이다. 86년 해태수석코치로 프로에 입문할 때부터 나온 신문 기사들을 들춰보면 '야구 전문가로서의 자질은 부족함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도 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 '자상함' '이해심' '흡인력' '포용력' '친화력' '소탈' 등 인간적 면모에 대한 평가 일색이다. 그러면서 주위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덧붙인다.

그가 해태코치로 선임돼 광주로 내려가던 중 OB(현 두산)의 한대화가 해태로의 트레이드에 반발, 은퇴를 불사하겠다고 버틴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에 들러 설득한 일, 해태의 머리 큰 선수들이 김응용 감독에 반기를 들려 할 때 이를 다스렸던 일은 널리 알려진 얘기이고, 이같이 사람을 다루는 능력은 감독에 대한 선수들의 항명으로 지리멸렬한 OB를 맡아 첫해에 우승시킴으로써 '공인'을 받게 되었다.

해태코치 시절 선수인 선동열이 후임 감독 물망에 올랐다는 설이 나오자 바로 재계약 포기를 선언한 그는 "3년 계약기간 마다 한 번씩은 성적을 냈고, 덕분에 한일슈퍼게임 감독, 시드니 올림픽 코치, 아시안게임 감독도 했으니 두산에서의 9년은 꽤 좋았던 것 같다"면서도 같이 일했던 코치들을 걱정했다.

쌍방울 감독을 그만두고 쉬는 2년동안 자신은 경기를 보고, 신문에 칼럼 쓰고, 학교들을 다니며 선수 돌봐주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코치들이 생활고를 겪는 걸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임기 중 퇴진하는 후배 감독이 있으면 "감독은 그만둬도 남은 기간 연봉을 받지만 감독을 믿고 따라온 코치들은 실업자가 돼 어려운 생활을 한다. 반드시 코치를 돌봐 주라"고 얘기 한다. 보스기질을 나타내는 마음 씀씀이다.

'김인식 야구'의 특징은 믿음과 기다림이다. 한번 선수를 믿으면 끝까지 기다린다. 물론 바탕에는 선수를 볼 줄 아는 탁월한 안목과 철저한 분석이 깔려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능력이 충분한 선수인데 기회를 못 살리고 그대로 주저 앉으면 본인에게도 불행이고 팀도 손해 아닙니까. 기다려 주어야죠." 오기에 가까운 믿음과 기다림은 쌍방울 감독시절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다.

91년 데뷔한 김기태는 4번을 맡고서도 4월이 다 끝날 때까지 타율이 2할을 밑돌았다. 그래도 평소 김기태를 인정해 온 김감독은 주위의 비난을 무릅쓰고 계속 4번에 넣었고, 어느날 LG와의 경기 중 볼카운트 0―3에서 타격 사인을 내리자 김기태는 그대로 휘둘러 첫 홈런을 만들었다. 이 한방으로 슬럼프를 벗어난 김기태는 그 해 신인 최고기록인 2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또 고졸 신인투수 김원형은 1승 뒤 내리 12차례 선발등판에서 9연패의 참담한 투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태평양과의 경기서 최연소완투승 기록을 세우며 4연승, 전폭적으로 지원한 감독의 체면을 살려줬다.

김원형은 8월에는 해태의 선동열과 맞대결해 1―0으로 승리, 최연소 완봉승까지 기록했다. 노력하는 자세를 보이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초인적(?)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리는 게 김인식감독이다.

금년 프로야구에서 막판까지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벌였던 심정수도 프로 2년차인 95년 OB시절 새로 부임한 김감독의 눈에 띄어 내야수에서 외야수로 자리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장타훈련을 쌓아 거포로 성장한 케이스이다.

95년 라이벌 LG와의 경기서 번번이 맥을 끊어 김감독이 "쓸데 없는 고집을 부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4번타자 김상호도 끝내 대분발, 막바지에서 팀이 승승장구 하는데 주역을 담당하고 홈런왕 타점왕에 MVP까지 획득했다.

2000년 받아주는 팀이 없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유니폼을 입은 노장 조계현이 한국시리즈에서 눈부신 호투를 펼친 것도 김인식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투수출신인 그의 마운드 운영은 누구도 흉내내기 힘들다. 2001년에는 10승 투수 한명 없이 우승했다. 페넌트레이스 3위를 한 후 투수비중이 절대적이라는 포스트시즌에서 이혜천 차명주 이경필 박명환을 적절히 교체하며 정상을 점령했다. 김감독은 좀처럼 한 점에 연연하는 작전을 하지 않는다. 일단 마운드에 오른 선발투수는 웬만하면 5회까지 가도록 한다. 4∼5점은 언제든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선수들을 믿고 이는 선수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돼 자신감을 넣어준다.

그는 또 투수 출신이지만 공격적 야구를 한다. "팬들은 재미있는 플레이를 원하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화끈한 걸 보여 줘야죠. 그래서 웬만하면 주문을 하지 않고 자기 플레이를 하도록 합니다." 물론 투수 조련에는 일가견이 있다. 해태시절 선동열 이강철을 다듬었고, 쌍방울에서 조규제를 신인왕으로 만들었다. 현재 기아에서 활약하는 이강철과 한화의 송진우는 동국대에서 가르친 제자이기도 하다.

김인식 감독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프로보다 대학감독 시절이 더 화려했다. 배문고 졸업후 한일은행에 입단, 65년 실업야구 신인상을 차지하기도 했던 그는 어깨부상으로 26세에 은퇴한 후 배문고와 상문고 감독을 거쳐 82년 동국대 감독으로 스카우트 돼 4년간 대학야구를 호령했다. 한대화 김민호 이문한 강정남 김봉근 황종선 민문식 박철우 백인호 이건열 김평호가 당시 선수였다.

첫해에 춘계, 추계리그에서 준우승했지만 다음 해에는 춘계리그에서 27년만의 우승을 이뤘고 그 동안 대학선발팀이 출전하던 '한일대학 친선경기'에 처음 단일팀으로 나가는 영광을 누렸다. 송진우가 입학한 84년에는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하고 85년에는 이강철의 활약으로 춘계리그 우승을 따냈다. 그는 주로 세광고 군산상고 광주일고로부터 인재들을 공급받았다. 휘하에 호남 출신 선수가 많았고, 해태코치, 쌍방울 감독을 맡아 그를 호남출신으로 아는 사람도 많으나 성북구 동소문동 태생의 서울 토박이이다. 상식과 의리를 지키다 보니 전임자가 맺어 놓은 인연을 유지하게 됐고, 배문고 후배 백기성 감독의 군산상고 선수들까지 받아 어려움 없이 정상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첫째 성공비결은 '탁월한 인간관계'이다.

유석근 편집위원

● 약력

1947년 서울생

배문중 배문고 한일은행선수

동국대감독(82∼85년)

해태수석코치(86∼89년)

쌍방울 감독(90∼92년)

두산감독(95∼2003년)

1995년 한일슈퍼게임감독

2000년 시드니올림픽감독(3위)

2002년 아시안게임 감독(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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