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야 다들 건강을 생각한다며 무공해식품을 찾고 녹즙이나 생식도 배달해 먹는 세상이지만 내가 유기농에 처음 성공했던 1980년 무렵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지금처럼 백화점이나 할인점에 건강식품 코너가 들어선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언론에서는 유기농이 성공했다고 보도했지만 판매망이 따라가지 못해 일반인들은 어디서 유기농산물을 사야 할지 몰랐고 정농회 회원들은 농산물을 처분하지 못해 발을 굴렀다.처음에는 지역별로 조직된 정농회 지회에서 회원을 모집해 집집마다 배달해 주는 방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다른 농산물에 비해 많게는 2∼3배나 비싼 유기농산물을 먹겠다는 신청자가 거의 없는데다 배달비만 엄청나게 들어 얼마 못 가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나온 아이디어가 직판장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실패였다. 천호동 부근에 정농회 직판장을 차렸는데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 4년여만에 문을 내려야 했다. 그 뒤 정농회는 경실련과 손을 잡고 '경실련 정농생활협동조합(정농생협)'을 만들어 직거래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다소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풀무원농장에서도 판매문제로 고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때 마침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을 갔다 와서 실업자로 있던 큰 아들 혜영이가 농산물을 판매해 보겠다며 나섰다. 지금 현대백화점이 들어선 강남의 압구정동 네거리에 혜영이가 처음 낸 가게는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이란 상호를 달았고 농장에서 생산한 무와 배추, 호박, 당근 등의 채소를 팔았다. 이게 나중에 '풀무원식품'으로 탈바꿈하고 지금의 친환경식품기업체 '풀무원'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의욕만큼 판매는 순조롭지 못해 두 해 정도를 버티다 혜영이는 손을 들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온 지금의 풀무원 대표인 남승우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말았다. 풀무원식품에서는 유기농의 판매가 시원치 않자 신세계백화점에 유기농산물 코너를 마련하는 등 나름대로 새로운 방식을 모색했지만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판매가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았던 것은 가격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건강을 생각해서 일반 농산물에 비해 2∼3배나 비싼 유기농산물을 선택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배추 한 포기에 100원이었다면 우리 농장에서 생산해 풀무원식품을 통해 판매한 배추는 200원 이상을 받았다. 하지만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는 대신 손으로 벌레를 잡고 퇴비로 어렵게 키워낸 것을 감안하면 아주 비싸다고 할 수도 없다. 나중에 풀무원식품의 위탁가공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두부도 일반 시중제품보다 2배 비싸게 팔았다. ㎏당 수입콩이 400원이었으면 우리가 생산한 콩은 1,400원이었기 때문에 원가측면에서 두부도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곳곳에서 유기농산물이 비싸다고 난리였다.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부자만을 위한 유기농산물 생산을 중지하라"는 식의 비판까지 하고 나섰다. 당시 이런 애로사항을 일본 애농회 관계자들에게 가끔씩 털어놓기도 했는데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일본에서는 소비조합에 가입한 회원들이 주말이면 농장에 나와 벌레를 잡아주는 등 농사일을 거들고 가격인상에도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웠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꼭 올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친환경식품기업으로 성장한 풀무원은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그러나 단순한 우연의 소산이었을까. 유기농으로 세상에 건강한 삶을 나눠주겠다는 내 의지가 하늘에 닿아 현실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고 믿는다면 지나친 환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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