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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헌법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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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헌법 파괴

입력
2003.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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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에 국민투표제가 도입된 것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때다. 이승만 독재의 징검다리인 이 2차 개정헌법은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 변경을 가져 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은 국회에서 가결된 뒤 국민투표에 부쳐 민의원 선거권자 3분의 2 이상 투표와 투표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국민투표 발의는 선거권자 50만명 이상이 할 수 있고, 투표에서 부결되면 국회 가결은 효력을 잃도록 했다. 허울은 국민 주도의 직접민주주의지만, 민의를 동원해 국회를 무력화하는 수단이었다. 이 낭만적 독재의 치졸한 장치는 아무런 쓸모 없이 4·19 뒤 3차 개헌 때 폐기됐다.■ 지금처럼 대통령이 주도권을 갖는 국가 중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는 1972년 유신헌법에서 도입됐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을 모델로 한 이 제도는 국회를 우회, 직접 국민의 뜻을 물어 국가의사 결정에 지지를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유신헌법 기초에 이바지한 헌법학자들은 국민투표 회부권을 국회해산권과 함께 국회에 대한 대통령의 우위를 보장하는 최대 무기로 해석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 수호를 국가 중요정책으로 규정, 이에 대한 찬반 투표를 자신의 신임과 연계시켜 정권을 연장했다.

■ 이 헌법사에 유일한 신임국민투표의 선례는 새삼 흥미롭다. 엄혹한 유신독재의 정통성 위기를 타개한 '국민투표 독재'도 형식만은 헌법의 틀을 지킨 것이다.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국민에게 물으면서,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의 정당성이 부정되면 불신임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이 선례에서 보듯이, 유신헌법의 국민투표 조항을 계승한 현행 헌법에서도 신임연계 정책국민투표는 가능하지만 아무런 정책 제시없이 대통령의 신임만을 묻는 국민투표는 헌법의 테두리 밖이라는 것이 다수 헌법학자들의 견해다.

■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만을 묻는 국민투표를 들고 나온 것은 정책국민투표의 본래 취지와 연혁, 어디에 비춰보아도 이해하기 어렵다. 유신체제처럼 통치의 본질적 정당성이 도전받는 처지도 아닌 터에, '헌법 파괴' 비난을 무릅쓴 의도나 전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단지 궁색한 처지를 벗어나려는 무리수로 보기에는 아쉽고, 건곤일척의 승부수로 보기에는 무모하다. 자유당 때의 낭만을 회상하는 것은 한가하고, 유신 독재보다 어설픈 것을 안타까워하기에는 참담하다. 어떤 고상한 뜻을 품거나 기발한 승부를 계획하더라도 헌법의 무게, 헌법적 선례의 교훈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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