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요구에 대해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 반응이 분분하다. 야당은 대통령이 측근 비리에 대해 면죄부를 얻고 지지세력을 재규합하여 내년 총선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통합신당을 띄우려는 정치적 술수라고 비난하고, 헌법학자들은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의 위헌성을 제기하고 있으며, 정치논평자들은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정혼란도 불사하려는 정치적 도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선거전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당선된 노 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걸고 던진 정치적 카드를 정략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무조건 폄하할 게 아니라 진지하게 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은 신뢰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의 실현을 약속하면서 당선되었고, 실제로 선거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를 통해 당선된 것을 참여정부의 가장 큰 존립근거로 자부해왔다. 취임 후 야당의 무차별 공세, 적대적 언론환경, 호남의 지지약화라는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국민이 보내주는 도덕적 신뢰를 자산으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다. 그러나 최도술씨를 비롯한 측근들의 비리의혹으로 도덕적 신뢰가 떨어져 자신에 대한 불신이 위험수위에 오르자 노 대통령은 더 이상 효과적 국정수행이 어렵다고 인식하게 됐다.
그런 신뢰의 위기가 노 대통령으로 하여금 재신임 요구라는 비상한 조치를 취하도록 몰고 갔다. 일련의 의혹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국민의 신임을 물은 뒤 대통령직을 걸고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 실현을 위한 개혁을 단행하는 것만이 신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노 대통령은 판단한 것이다. 사실 우리의 정치권 전반은 심각한 신뢰의 위기에 빠져있다. 정치권이 불신 받는 가장 큰 이유, 다시 말해 정치권의 일상화한 부정부패와 그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2001년과 2002년 사이 한국의 청렴도 순위가 40위에서 50위로 떨어졌다는 최근 국제투명성기구의 발표내용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정치권의 부정부패는 한국정치의 발목을 잡아온 지 오래다. 우리 정치인 중 정치자금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통념이다. 검찰의 불법정치자금 수사로 정치의 많은 영역이 검찰의 손에 들어갔고, 정치 영역은 왜소화하고 말았다. 정치는 검찰수사를 둘러싸고 원색적인 공방을 벌이는 저차원의 정치로 추락하였다.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정치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으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도 요원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번에 국회연설에서 "부정부패의 철저한 조사, 그리고 고해성사, 필요하면 대사면, 제도개혁"이라는 절차를 통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우리 정치권의 도덕적 신뢰를 다시 세우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노 대통령이 제안한 국민투표 방식은 정책과 연계하지 않고 단순히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여부를 묻는 방식이다.
이는 조건없이 신임을 물어야 한다는 당초 야당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이기는 하나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에 한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헌법 72조와 관련해 위헌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이 같은 위헌성 문제는 정치권이 정리해주어야 할 것이다. 재신임을 묻는 것이 국가안위에 관한 사안인가는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다.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의 퇴진보다 더 국가안위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투표를 중요 정책과 연계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그 역시 정치권의 합의가 선결되어야 한다. 정치권이 국민투표를 정치적 득실계산 등 정략적 대응이 아니라, 부정부패 척결을 통한 한국정치의 신뢰회복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정책과 연계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어렵지 만은 않을 것이다.
임 혁 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