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초 베이징 회합이후 진전을 보지 못하던 6자회담에 청신호가 보이고 있다. 그 동안 3자와 6자회담에서 "선 핵 포기, 후 안전보장"이란 순차론 입장을 집요하게 고수 해 오던 미국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파월 미 국무장관은 지난 10일 워싱턴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국무부 관리들이 북한의 안전보장과 관련하여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하고 있으며, 다자가 참여하는 대북 안전보장 방안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 바 있다. 미 국무부는 이와 관련 우크라이나 사례를 크게 참고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모델은 소련 해체이후 우크라이나에 집중 배치되어 있던 핵 병기를 해체하기 위해 1994년 5월에 우크라이나와 미국, 러시아, 그리고 영국간에 체결된 다자간 합의각서에 기초하고 있다. 주요 골자는 우크라이나가 핵 비확산 조약에 가입하여 특정 시한까지 보유 핵 병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대가로, 미국 러시아 영국 세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다자간 안전 보장을 해 준다는 것이다.
이 합의 각서에 따르면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과 관련하여 여섯 가지 사항에 대해 약속해 주고 있다.
첫째, 우크라이나의 독립, 주권, 그리고 영토를 보장해 준다. 둘째, 유엔 헌장에 의거, 자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군사 위협이나 무력 행사를 가하지 않는다. 셋째, 우크라이나에 대해 경제적 강압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넷째, 우크라이나가 외부로부터 재래식 또는 핵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 러시아 영국은 즉각적으로 유엔 안보리의 조치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제공한다. 다섯째, 미국 러시아 영국은 핵 공격을 받을 경우 이외에 어떠한 형태로도 우크라이나에 대해 핵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합의 사항에 문제가 생길 경우, 미국 러시아 영국은 서로 협의를 한다.
우크라이나 모델은 현재 6자회담의 경색 국면을 타결하는 데 있어 세 가지 큰 함의를 부여해 주고 있다. 그 하나는 북한이 시종 요구해온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양자간 불가침 조약'체결에 부담을 느껴 온 미국측에 다자간 합의 각서란 새로운 대안적 돌파구를 마련 해주는 장점이 있다.
다른 하나는 적대 관계 해소, 주권의 상호 존중, 내정 불간섭, 그리고 핵 불사용 원칙 등 북한이 93년 공동성명, 94년 제네바 기본합의, 그리고 2000년 10월 조명록―올브라이트 공동성명 등을 통해 미국 측과 합의했던 사항들을 6자 회담 채널을 통해 재보장해 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합의 사항들을 하나의 문건에 압축시켜 전 세계적으로 재천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영국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었던 안보 위협을 해소하는데 공헌했듯이, 북한의 우호 세력인 중국과 러시아가 6자회담 틀 안에서 합의 각서의 당사자로 참여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북한의 안보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번에는 파월의 구상이 구체화 되기를 바란다. 북한 측으로서는 우크라이나 모델이 다소 미흡한 점이 있겠지만 이 제안이 구체화 될 경우,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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