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여름, 고교 2년생이었던 나는 청소년적십자 대표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열린 지도자 훈련에 참가했다. 서울 구경 한번 못해본 시골 촌놈에게 일본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라왔으며 상당부분 충격이었다. 처음 타 본 에스컬레이터나 지하철이 그랬다. 또 좌변기의 사용 방법을 몰라 얼마나 난감했는지…. 스파게티를 일본식 자장면인 줄 알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후닥닥 먹어 치우는 나를 미국 친구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던 시선에 우쭐대기도 했다. 나중에 그것이 스파게티이고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혼자서 얼마나 겸연쩍어 했던지 지금도 스파게티를 먹을 때 마다 기억이 나곤 한다.모든 것이 새롭고 놀라웠다. 그러나 가장 부러웠던 것은 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던 요요기 국립경기장이었다. 파란 잔디에 수만석의 의자를 갖춘 경기장의 아름다움이나 웅장함에도 놀랐지만 올림픽은커녕 변변한 국제대회 조차 개최할 시설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이 어린 마음에도 아프게 다가왔다. 언젠가는 저 잔디 위에서 뛰어 봤으면, 또 언젠가는 우리도 저런 경기장을 갖추고 올림픽을 한번쯤 개최해 봤으면 하는 것이 그 때의 내 솔직한 바램이었다.
그런데 그 소망은 정말 기적처럼 모두 이루어졌다. 나는 88서울올림픽대회 준비에 약 6년간 참여했다. 사실 서울올림픽의 모든 것들이 내겐 '평생 잊지 못할 일'들이다.
수영에 50m 자유형 종목을 추가해 주는 대신 우리의 강세 종목인 양궁의 단체전을 신설하여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양궁에서 금메달 4개 모두 석권하게 된 일, 시범종목이었던 태권도 시상식에서 미국국가가 나오지 않아 우승한 미국 여자선수가 스스로 목청껏 국가를 부르던 일, GBR(영연방)과 GDR(동독)을 혼동하여 다른 국기가 게양될 뻔한 일 등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여자 100m와 200m 를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뒤 잠실 주 경기장의 트랙에 엎드려 입맞추고, 두 손 고이 모아 감사 기도드리던 지금은 고인이 된 조이너스 그리피스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나는 그 때 그녀의 모습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미의 여신 비너스가 현실 세계에 나타난다면 아마 그녀의 모습이리라.
나는 운 좋게도 2002FIFA월드컵의 조직에도 참여했다. 월드컵의 기억은 아직도 모두에게 생생하기에 지금 소개하기에는 너무 이른 듯하다.
다만 월드컵이 끝난 후 한일 양국 조직위원회 직원들 간의 친선 축구경기가 위에 소개한 요요기 경기장에서 열려서 한 번쯤 밟아 보고 싶던 그 경기장의 잔디를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요요기 경기장에서 가졌던 그 작은 소망이 내 삶 속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문 동 후 전 2002월드컵 조직위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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