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해 농사를 지으면서 유기농에 대한 안목도 커졌다. 실패를 통해 얻은 소득인 셈이다. 흙 1g에 5,000만∼1억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으며 이들을 살리는 것이 유기농의 관건이라는 것도 이때 터득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자연히 이 미생물이 죽게 되지만 농약과 화학비료를 끊기만 한다고 미생물이 되살아 나지 않았다. 미생물도 생명체인지라 영양분을 먹어야 살아 나는데 이들의 먹이는 다름아닌 퇴비 같은 유기질 비료라는 것이다.그러나 유기질비료가 만능은 아니었다. 유기질비료 가운데도 질소성분이 많은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질소가 많이 함유된 고질소비료를 주면 농작물이 무성하게 자라기는 했지만 과실이 굵지 않았다. 더욱이 고질소비료를 뿌린 농작물에는 벌레들이 들끓어 큰 애를 먹었다. 유기질비료 가운데 질소성분은 가축의 분뇨에 많이 포함돼 있어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차차 알게 됐다.
유기농법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정농회 회원인 우리는 일본 애농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정농회 차원에서 애농회 관계자를 국내로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했고 일본을 방문해 유기농법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또 정농회 회원들끼리 유기농법에 대한 정보교환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2년째는 300만원을 밑지는 선으로 손해의 폭이 줄었다. 기술적인 노하우가 발달하고 토양도 좋아진 결과였다. 이렇게 해서 양주로 넘어와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은 지 3년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대량생산은 현실적인 이유로 불가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유기농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던 때라 시장에 내놓을 물건은 극히 소량에 불과했다. 유기농산물 대부분은 공동체에서 자급하는 식량으로 사용하고 남는 것은 교회나 농촌운동을 통해 알게 된 지인들에게 조금씩 받고 넘기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대량생산할 처지가 아니었고 또 그만한 기술도 없었다.
유기농으로 큰 금전적 이득을 얻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기농이 나의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젊은 시절 간디스토마에 감염돼 둔기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항상 멍하고 현기증도 심했는데 유기농을 하면서부터 이런 증상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농약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다 유기농으로 경작된 현미로 밥을 지어 먹은 것이 주효했다.
내가 유기농에 성공해갈 무렵 전국 정농회 회원들에게서도 비슷한 소식이 들려왔다. 농약을 치다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오던 당시 이런 소식은 일반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1980년 전후로 각종 매스컴들이 유기농 성공을 앞 다투어 보도하면서 유기농은 일반인들에게 점차 인식의 폭을 넓혀갔다.
특히 매스컴의 보도는 풀무원농장에 집중됐다. 유기농의 성공뿐 아니라 공동체생활이라는 독특한 생활형태가 관심을 끈 게 아닌가 한다. 어쨌든 풀무원농장이라는 데서 농약과 화학비료를 안치고 농작물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소식이 매스컴을 타면서 농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서울에서 차를 이용해서도 족히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골길을 달려 유기농산물을 구하러 오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드디어 내가 고생한 몇 년간의 고생이 보답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농산물의 공급과 관련한 걱정이 밀려왔다. 알음알음으로 몇 시간씩 달려오는 소비자를 믿고 무작정 생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건강한 농산물을 함께 나누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그러나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당시 실업자로 있던 큰 아들 혜영이가 공급책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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