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보면, 권력의 독점·독단의 폐해를 극복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시국에서는, 국민의 대표들이 합의체 국가기관을 구성해 이념 및 정책적 이견을 교환하고 견제와 균형을 통해 합의 또는 타협을 이루는 정부형태, 즉 의원내각제가 보다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중심제가 의원내각제와 함께 대안적인 정부형태로 제기된 이유는 의원내각제의 성공이 정당의 정체성과 안정성, 민주성 등 까다로운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우리 정당들의 행태를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의원내각제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대통령중심제는 역사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정부형태인 만큼 그 성공 여부도 여러 제도적, 비제도적 요소에 종속되어 있다. 의사형성을 위한 합의체적 과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통령의 권위를 더욱 존중하고 일정 기간 정책결정과 집행의 권한을 높여주는 정치적 관행이 필요하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대통령의 권위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 대통령이 야당 및 언론과 일정 기간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미국의 전통이 좋은 예이다.
최근의 재신임 정국은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앞서 지적한 통치환경이 처음부터 갖추어지지 못한데 대한 극약처방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수긍할 수도, 또 수긍이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행사가 정치적 고려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를 장기적으로 지배하는 근본가치의 결집체인 헌법이 존중되어야 한다. 국민투표는 주요 정책결정을 국회에서, 또는 국회와 대통령간의 협조 및 견제를 통해 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국가의사를 결정하는 방법이며, 결코 정상적인 국가의사결정 방법이 아니다.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또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형태의 국민투표는 우리 헌법에 나와있지 않으며, 구구한 해석을 통해서 극복될 문제도 아니다. 더욱이 국민투표는 국민 과반수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양자택일의 지극히 단순한 질문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기술적 한계가 있다. 복잡한 질문을 통해서는 국민의사를 명확하게 판가름할 수 없으며, 단지 그 경향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국민투표는 여론조사와 다를 게 없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는 투표는 정책문제와는 달리 질문이 아무리 단순하게 구성되더라도 여기에 내포되는 의미는 대단히 복잡하다. 따라서 판단기준이 오히려 모호해지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상징조작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또 국민투표는 국민의 정서적 지지에 호소하여 정상적인 국가의사결정 과정을 무력화할 가능성이 있다.
국민투표는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투표 결과에 좌우되어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실적으로 국민투표의 결과가 야당의 행태를 즉각 변화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설혹 그러한 효과가 있더라도 지극히 단기적 현상에 그칠 뿐이다. 이 점에서, 국민투표를 통한 재신임 문제가 제기되자 양손을 들고 환영했던 야당의 당초 태도는 순진한 낭만인지 혹은 보다 심오한 정략이 숨어 있었던 것인지 이해가 안간다.
재신임 정국은 헌법의 위기이며, 국가의 위기이다. 재신임 정국이 정파세력들에게 공화국의 의미, 즉 공익을 지향하는 권위와 책임의식을 회복하고 자기숙고를 하는 계기가 된다면 위헌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이러한 기대는 난망인 것 같다. 재신임 발상의 계기였던 정치상황, 그리고 재신임 발상과 이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국민통합보다는 분열과 정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광 석 연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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