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영화 공간을 만드는 사극은 역설적으로 당대의 문화적 욕망을 반영하고, 동시에 사회·정치적 갈등을 함축한다. 정통성이 허약한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성웅 이순신'(1971년) 등 무관의 역사가 집중적으로 다뤄졌고, '심의'의 칼날이 시퍼렇던 80년대 에는 같은 이유로 '어우동' '뽕' 같은 에로 사극 영화에는 칼끝이 무뎌졌다.80년대 이후 또 다시 사극 열풍이 불고 있다. 물론 그 양상은 다르다. 시대와 인물이 엄격히 설정됐지만,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지극히 분방하며 동시대의 감각이 영화 전편에 녹아있다. 퓨전 사극이라 부를 만하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프랑스 혁명 전의 퇴폐적 상류사회를 그린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1782)'가 원작으로 로제 바딤(1959년), 스티븐 프리어즈(1988년)가 같은 제목으로, 밀로스 포먼이 '발몽'(1989년)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는 등 끊임없이 영화감독을 유혹했던 작품이다. 전작들이 모두 심리 묘사에 치중했듯,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역시 연애 심리 묘사에 치중했지만 과감하게 동시대의 연애 감정과 대사를 녹여 넣는 방식을 통해 '한복 입은 현대극'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스캔들'은 유교 이데올로기의 통제를 강하게 받는 사대부 집안의 모습 대신 근친상간, 혼전 관계 등 억압된 욕망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또 현대적 감각의 대사와 '쿨'한 정서 등 현대적 드라마의 설정을 통해 사극이 가진 고색창연한 느낌을 털어내며, 독특한 판타지적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이런 동시대적 감성이 흥행의 큰 요인이 됐다는 게 영화계의 반응이다.
660년 계백과 김유신의 대결을 그린 '황산벌'(감독 이준익, 17일 개봉)은 아예 현재의 정치 국면을 그대로 인용한다. 현재 영호남에서 사용되는 사투리를 1300여년 전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물론 부시 미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당 태종의 입을 빌어 재현되고, 암호해독관의 해독장면에는 교육방송의 수능해설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이 사용된다. 기존 사극 영화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접근 방식이다.
아예 파격적인 코미디도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 '낭만자객'(감독 윤제균, 12월5일 개봉))은 처녀 귀신의 한풀이에 나선 멍청한 자객의 활약을 그린 무협 영화. 시대 배경을 조선시대로 설정했으나 시대 고증보다는 새로운 공간과 웃음 만들기에 주력한다. 한때 서울 강남의 대표적 나이트클럽이던 '줄리아나'를 패러디한 '주리아나'(酒里亞羅) 주점에 테크노 댄스 음악이 흐르는 장면은 이 영화가 퓨전 사극 코미디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적비연수'처럼 판타지 사극에 속하는 '천년호'(감독 이광훈, 11월14일 개봉)도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에 들어가 있다. 신라 진성여왕 시절이 배경이지만, 신라 개국 초기 아우타 족이 몰살당하고, 그들의 원혼이 복수를 꿈꾼다는 설정의 판타지이다.
최근 우리 영화계의 사극은 고증에 입각한 왕조 사극은 자취를 감추었다. 20여년 간 사극의 맥이 끊어져 의상, 소품 등을 정확한 고증을 거쳐 제작하는 데 엄청난 자금이 든다는 것이 고증과 상관없는 퓨전, 판타지 사극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물론 자기 역사를 엔터테인먼트로 즐길 수 있을 만큼 우리 영화 문화가 깊어졌다거나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뚜렷한 유행인 판타지에 대한 열망도 변형된 사극이 잇따르는 한 배경이다.
'스캔들'이 입증했듯 요즘 관객들은 사극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데다 '황산벌' '낭만자객' 등에 대한 관객의 기대도 커진 상황이어서 당분간 사극의 파괴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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