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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어머니같은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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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어머니같은 누님

입력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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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발목에 차고 다니면 정신도 맑아지고 몸이 건강해진다더라. 출근하기 전에 잊지 말고 챙기거래이."시골에 사는 누님이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올해 회갑인 누나는 팔순 시부모를 봉양하며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 누님은 나름대로 바쁜 생활에도 도시에 사는 나를 잊지 않고 챙긴다. 이번에는 의료기 체험실에서 맥반석 발찌를 얻어와 한사코 발목에 걸어주고 사라졌다. 자그마한 체구의 어디에서 이런 바다 같은 사랑이 나오는지….

누님은 남아선호가 드셌던 시절의 희생자이다.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재주도 많았지만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나에게 학업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사내라는 이유만으로 고등교육을 마쳤다.

누님은 집안 살림에만 머무르지 않고 논밭에 나가 농사도 도왔다. 내가 학교에 갈 때면 교복이나 도시락을 빠짐없이 챙겨 주었다. 그런데 나는 누님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반찬 투정도 하고 사춘기 때는 이유 없는 반항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느 날 고향 마을에서 십리 가량 떨어진 읍내 극장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친구들과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영화를 볼 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누님에게 투정을 부렸다. 누님은 잠자코 듣더니 치마 속에 감추어둔 지폐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영화 보다가 배고프면 주전부리도 해라."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긴요하게 쓰려고 모아둔 돈이었을 게다. 그 돈을 당연한 듯 으스대며 받았던 내 모습이 지금은 아련하게 씁쓸한 기억으로 남는다.

남을 의심하지 않고 감동 잘하는 누님의 천성은 어른이 돼서도 변함이 없다. 막내로 태어난 내가 결혼 적령기에도 짝을 찾지 못하자 당신의 시댁 부모께 중매를 부탁 드려 지금의 아내와 연을 맺어 주었다. 누님은 또 내가 젊은 시절에 견비통으로 고생하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구해주었다. 그러고서도 내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지난번 네 생일을 잘 챙겨줘야 했는데…. 누나 된 도리를 못해 미안하구나."

단발머리 소녀였던 누나가 이제는 손주 셋을 둔 할머니가 됐다. 나는 아직도 누님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누님, 무어라 할 말이 없군요. 미안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누님을 챙기며 살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장만선·부산 해운대구 우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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