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심각한 '불황 병'을 앓고 있다. 청년실업 대란, 구조조정, 명예퇴직, 환율쇼크, 개인파산, 연쇄도산 등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당시 고통을 안겨줬던 단어들이 우리 삶을 다시 옥죄고 있다. 그러나 IMF 위기 당시는 모든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힘들었던 상황이었던 데 비해 최근의 상황은 봉급생활자, 자영업자, 서민들의 삶이 더 피폐해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감원 괴담' '취업 대란'
H건설 김모(34) 과장은 2년전만 해도 동기 중 승진이 빨라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감원을 앞두고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다른 기업에서 시작된 명예퇴직 바람이 우리 회사에도 곧 불어 닥친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몇년치 연봉과 위로금을 주며 퇴사하라는 방식이 될 것 같다. 물론 고참 과장, 차장 등이 1차 대상이겠지만 그런 소문들이 떠돌면 회사 다닐 맛이 나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때려 치우고 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경기도 좋지 않은데 막상 나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KT에 이어 일부 우량 기업들도 감원 행렬에 동참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직장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C그룹 김모(31)씨는 "12월 구조조정설부터 시작해 만약 명예퇴직을 거부하면 국물도 없이 회사에서 짤릴 것이라는 괴담까지 사무실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전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민관 경제연구소들이 올초 예측했던 경제성장률 5% 달성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보고 있다. 실제 지난 2·4분기 성장률 1.9%는 98년 -6.7% 이후 최악이었다. 이 같은 경제성장률 저하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져 청년실업 대란을 야기하고 있다. 대학생 정모(27)씨는 신문에 실린 취업 성공기를 읽을 때마다 화가 난다. 아무리 주변을 돌아봐도 취업한 사람은 극히 드문데 언론이 이를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는 것. 정씨는 "6년 전 IMF 체제 당시 '그래도 내가 졸업할 무렵이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했고, 대기업들도 당시에 비해 수익을 꾸준히 내서 기대가 컸다"며 "그러나 '감원 대란' 소식은 들려도 '취업 대박' 이야기는 없더라. 절망 그 자체다"고 말했다.
서민에게는 2배 이상의 고통
봉급 생활자의 고통은 곧바로 자영업자와 서민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직장인의 지갑이 열리지 않으면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곳은 사교육 시장. S영어학습지 지사를 운영하는 한모(32)씨는 구독자 수가 최근 30% 정도 급감하면서 본사에 원금 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다. 한씨는 "경기가 힘들면 교육비부터 줄인다더니, 예체능 학원의 초등학교 수강생이 줄어들더니 이젠 미래를 대비한 영어공부도 시키지 않고 있다"며 "경기는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법인데, 몇 년째 바닥에 머물고 있다.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목청을 높였다.
택시업체와 음식점들도 아우성이다. 택시기사 정모(40)씨는 "손님이 없어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지다 보니 손님을 두고 싸우는 기사들도 있다. 12시간 일해 사납금 채우고 나면 2∼3만원 남는다. 그나마 밤잠을 설치며 뛰어야 이 정도 번다. 50만원 가량 들어가던 초등학생 아들 딸의 학원 수강을 포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보문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정모(52·여)씨는 "식사를 맞춰 사먹던 직장인들이 식사비를 5,000원에서 3,500원으로 낮춰달라고 한다. 저녁 시간에는 술 손님도 거의 사라졌고, 단체 예약도 뚝 끊겼다. 불황기에 돈 되는 것은 음식장사 밖에 없다더니 그 말 마저 이젠 틀린 것 같다"고 불안해 했다.
일용직 종사자들은 이미 기대를 포기한 상태였다. "더 추워지기 전에 공사를 마쳐야 하는 성수기라 일자리는 많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3개월 이상 굶고 살아야 한다. 경제 활황은 바라지도 않는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도록 무언가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서울역 앞 인력시장에서 만난 50대 초반 노무자의 꿈은 절박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 IMF때 어떠했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전후로 30, 40대 중산층에게 몰아닥친 후폭풍은 엄청났다.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IMF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최대의 국난이었다. 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지고 부서가 통폐합되면서 정리해고가 되거나 무급휴직으로 졸지에 회사를 떠났다. '평생직장'이라는 환상은 처절히 깨졌다. 살아남은 직장인 조차 월급은 반토막 나고 보너스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주식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거의 모든 회사가 초긴축 상태에 들어가자 중산층 가정은 너 나 할 것없이 자녀들의 유치원비 학원비 등 이른바 사교육비를 먼저 줄였다. IMF 직후인 1998년 유치원은 원생수가 18년만에 감소했고 문을 닫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속출했다. 게다가 술, 담배 소비량까지 1∼4%까지 줄었으니 직장인들의 피 말리는 긴축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연 20∼30%까지 치솟은 금리에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직장인들 상당수는 가정을 합치는 신풍속이 나타났다. 며느리는 시댁생활, 사위는 처가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생활비를 줄이고 보육비용을 아끼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형제가 집을 합쳐 생계비를 줄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때 만큼 부모형제가 힘이 된 적이 없을 정도다.
'내 집 마련'의 꿈이 악몽으로 변했다. 30, 40대들에게 지상 최대의 꿈은 아파트 분양 당첨이었지만 IMF를 전후해 당첨이 되고도 계약을 포기하는 비율이 50%를 넘었다. 아파트 대출금 연체가 잇따랐고 중도 해약이 속출했다.
30, 40대 직장인들이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평생 직장' 개념이 무너지면서 직장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비전을 해외에서 찾았다. 이민 설명회마다 30대들로 성황을 이루었고 이들 대부분은 엔지니어나 정보통신업계 종사자들이 많았다. 김포공항에는 이민가는 아들을 배웅하며 눈물짓는 부모와 친지들이 수시로 목격됐다. 얇아진 호주머니로 소비가 극도로 침체되자 이른바 '충격세일' '도산세일' '번개세일'이라는 이름의 신종 세일 붐이 일었다.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는 것은 예사고 1만원, 10만원짜리 물건의 일부를 10원이나 100원에 팔면서 손님 끌어모으기에 혈안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중산층이 급속히 몰락하는 가운데 부유층은 오히려 IMF 체제를 즐길 정도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심화됐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 30대 명퇴자의 창업일기
11년 동안 유망 중소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해 온 최종원(37·사진)씨. 자동화시스템 전문가로 IMF 위기도 극복하며 퇴직 전까지 회사 일만 알고 살아온 그에게 느닷없이 명예퇴직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은 지난해 9월. 신규 사업 부서가 경기 불황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자 회사는 팀장이었던 최씨에게 사실상 권고 사직을 요구했다.
"막상 퇴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력을 다해 재도전 하려던 참이어서 낭패감은 더 컸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회사는 11년 동안 근속한 최씨의 퇴사 절차를 단 이틀 만에 마무리지었다. 대신 고용연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권고사직 방식을 택하고 2개월치 급여를 지급하는 배려를 해줬다. 최씨는 "퇴사 후 계약직으로 잠시 근무했지만 결국 나올 수 밖에 없었다"며 "중소기업은 40대 중반이 정년이라 막연히 창업을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최근 1∼2년 사이 30대 중·후반에 속하는 친구들 가운데 7∼8명이 사실상 명예퇴직을 하고 창업에 나섰다고 전한 최씨는 "남은 회사 동료들 역시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일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이에요. 능력 없으면 나가라는 분위기도 심한데다 특히 근속 연수가 길고 고연봉인 직원들은 회사측의 무언의 퇴사 압력에 제 발로 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행히 최씨는 퇴직 8개월만에 창업을 통해 제2의 인생에 도전하고 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모은 5,000만원과 은행 대출금을 합쳐 편의점을 개점했다. 인건비를 줄이려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연일 강행군을 한 덕에 개점 넉 달 만에 겨우 적자를 면하는 안정세에 접어들었지만 경기 불황 탓에 언제 다시 적자로 돌아설지 걱정이 태산 같다.
"회사 생활은 좋은 인생 경험이었고,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일찍 기회가 찾아온게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안정된 평생 직장은 없다고 봅니다. 차근차근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게 불황시대를 버텨낼 수 있는 지름길인 것 같습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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