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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배 명산지 나주의 "배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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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배 명산지 나주의 "배김치"

입력
2003.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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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어그, 새파랗게 보이는 거시 온통 배나무여." 광주에서 전남 목포까지 이어지는 국도 1호선 나주 구간. 추석 물량에 대느라 수확을 서두른 탓일까. 걷이를 끝낸 배 밭은 하늘로 솟아 초록빛으로 여무는 어린 순들로 분분했다. 배 농군에게는 이맘때부터 첫 서리가 내릴 때까지가 가장 한가한 시기. "11월부터 퇴비작업을 시작혀서, 4월 배꽃이 피믄 배 딸 때 까지 눈코 뜰 새가 없지라." 배 밭이 소복으로 뒤덮이면 꽃 가루 채취해서 수분을 해줘야 하고, 물 오르는 5월부터는 가지들을 정돈한다. 배 알이 구슬 만해지는 5월말이면 열매를 솎아주고 봉지를 씌운다. "꽃 핀 뒤부터 8월 말 열매가 여물 때까지 4, 5일 간격으로 약을 해야 혀. 잠시만 손을 덜 주믄 모두 '독배'가 되어분게."교과서에도 실린 왕조 진상품 나주 배의 성가야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삼한 이래 글로 남은 배의 역사도 나주에서 비롯됐고, 왜인들이 국내에서 배 상업농을 처음 시도한 곳도 나주였다. 지리·지형적 특질로나 토질과 햇살, 바람이 빚어내는 과육의 질로나 나주를 떼어놓고 배를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농민들은 나주 배는 단맛이 혀로 달려드는 품세부터 다르다고 했다. "딴 동네 배 맛은 얼렁 달겨 들고 후딱 도망쳐 불지만, 나주 신고배 맛은 진득허니 질기당게." 그것을 30년 배 농군 김문곤(50)씨는 '깊은 맛'이라고 표현했다. 연전 내한했던 유명한 팝가수 마이클 잭슨이, 이브를 유혹했던 '선악과'가 이런 맛일 것이라며 감탄했다는 그 맛이다. "이것 좀 보소. (빛)깔이 좀 곱소? 꼭지나 똥구녕도 배꼽자리 겉이 옴팡하고, 여인네 속살처럼 보다리한 거이 맛을 보나마나 모도 상품(上品)이제." 정호양(49)씨의 나주 배 칭찬이 기도문처럼 매끄럽고 리드미컬하다. 그것은 듣고 외워서 되는 일이 아니라, 체험하고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여느 과수농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나주 배 농사도 한 해가 다르다. 입맛들이 다양해지고, 그 입맛을 앞질러가는 먹거리들이 나라 안팎에서 넘쳐 들면서 배 수요도, 단가도 예전 같지 않게 된 것이다. '깊은 맛'까지야 모를 일이나, 당도에서나 외양에서나 결코 나주 배에 꿀리지 않는 배들이 전국 어디서나 난다. 그나마 나주 배의 명성도 질 낮은 중·하품을 내다가 길 거리에서 호객하는 이들 탓에 흐려지는 형편. 지자체고 농민들이고 마음이 달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재복씨 처럼 게르마늄 비료를 줘 육질이 단단하고 몸에 좋다는 기능성 배를 출하하는 이도 있고, 숯이나 옥을 재배에 활용하는 이도 생겨나고 있다. 농약 대신 질경이나 미나리 쑥 같은 독한 식물 추출액으로 농사를 짓는 저농약·유기농 재배로 차별화하려는 시도도 보편화하는 추세. 더 이상 나주 배 명성에만 기댈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저급품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시에서 상품성 없는 낙과나 저급품을 수매해 폐기처분하는 것만도 연간 8억∼10억원대. 나주시 관계자는 하품 배를 재활용하기 위해 지금까지 영세 가내수공업자들에게 내맡겨 온 배즙이나 엑기스, 배 퓨레 등 사업을 제3섹터 방식으로 흡수, 민관합자 배 가공·유통업체를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나주 배 김치'도 그런 맥락에서 시도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오랜 세월 전라 행정의 핵(나주목)이었고, 남도 물산의 중심지였던 나주이고 보면 맛에 대한 기준도 간단하지는 않을 터. 젓갈과 뭇 재료의 조화에 좌우되는 나주 김치가 있어 오늘의 나주 곰탕 명성이 이어져 온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믿음이다. "연말 김장이 1년 농사만큼 중요허지라. 돼지고기 소고기 볶아넣고, 갈치 병치 삼치 포 뜨고, 액젓에 새우젓에 멸치젓 갈아 넣고, 거창하제." 그렇게 담가 묻어 둔 김치는 냉수 만 밥에 '묵은지' 가 등장하는 7,8월 전까지 식탁 한 가운데를 차지한다. 문영자(64)씨는 "철 되믄 동네 스무나믄 집 안식구들이 김장 품앗이를 헝게, 동네 김치 손 맛은 다 배우제." 반 백년씩 익은 남도의 숙수들이 나서 김치에 나주 배의 맛을 새롭게 조화시키는 것이니, 기대도 자못 크다.

"김치에 배를 갈아 넣고, 채 썰어 넣으믄 쌈박해서 설탕가리 칠 일도, 조미료 칠 일도 없어. 배 단가가 비싼 게 조미를 통 안할 수는 없는 거이지만." 연초 문을 연 김치공장 '미가원'이 가공을 맡고, 지역 유지들과 정호선 전 국회의원 등 출향민들이 공동출자해 설립한 '(주)나주배김치사랑'이 판로 개척을 맡았다. 새우젓을 넣어 담백한 맛을 내는 서울식 김치와 멸치젓을 주로 한 전라도식 두 종에 깍두기 알타리김치 파김치 백김치 열무김치로 구색을 갖췄다. 납품하는 상자에 나주 배를 하나씩 사은품으로 끼워줄 참이다.

배나무란 천성이 가지마다 수직으로만 치솟기 때문에 열매가 부실하고, 결실도 적다. 해서, 농민들은 물이 오르는 봄철이면 가지를 뉘어 옆 나무들과 어깨동무를 지워 바람에 견디게 한다. 명품 나주 배가 다른 토종 작물들과 어깨를 겯고 나선 것도 어려운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것. 나주 배 김치는 그 시도의 출발이다.

/나주=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지역 브랜드로 키워가야죠"/신정훈 시장·최정원 사장

나주 장날인 지난 9일. 경영 경력 8개월의 미가원 여사장 최정원(36·왼쪽)씨가 젊은 행정가 신정훈(40) 나주시장과 마주 앉았다.

(최 사장) 큰 돈 벌자는 것은 아닙니다. 농민도 살고, 나도 살자는 일이니 힘을 보태주십시오.

(신 시장) 일찌감치 만나고 싶었습니다. 나주김치와 나주 배 궁합이 기막히게 좋습니다. 우리가 지역 품목을 활용한 다양한 상품을 활성화해 지역브랜드로 키워야지요.

(최 사장) 태풍에 물난리에 배추·야채 값이 너무 비쌉니다. 자금이 달리는 저희 같은 기업도 배추나 야채를 계약재배해 안정적으로 물량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십시오.

(신 시장) 제가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겁니다. 우리 기업이 우리 지역 농산물을 계약재배해서 쓰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요. 그러면 시나 농협이 계약재배 보증인이 될 수도 있고, 계약금 예산 지원도 가능합니다.

(최 사장) 그렇게만 된다면 제조단가도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강원도에서 고냉지배추 한 차 싣고 오는데 물류비만도 50만원이 넘으니까요.

(신 시장) 최근에 학교급식 지원조례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산을 지원해 학교마다 텃밭을 가꾸게 해서 학생들이 유기농업을 체험하고, 좋은 야채를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최 사장) 그 야채로 만든 토종 김치를 납품하면 좋겠습니다. 이익금 일부는 기금으로 환원하겠습니다.

(신 시장) 그것도 좋겠지요. 다양한 프로그램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선 시장으로서 힘 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 사장님도 지역을 위해 노력해 주십시오.

배 농사 10년 경력자인 신 시장과 최 사장은 나주 배와 김치의 궁합, 주민과 지자체·기업의 궁합을 두고 꽤 긴 시간 의견을 나눴다. 젊은 행정·젊은 경영이 만났으니 길이 보이더라는 것이 두 사람이 얻은 그 날의 소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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