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 뉴스나 신문을 보고 나면 매번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신조 삼아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힌 정치인과 기업인 때문이 아니다. 이런 일에는 마음을 한수 접어둔 지 이미 오래다. 근래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끔찍한 일들이 우리 사회의 보통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신용카드 빚에 시달리던 채무자가 부녀자를 납치하거나 강도행각에 나서는 것은 차라리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일부 신용불량자들이 자녀에게 극약을 먹이거나 흉기로 살해한 후 자신의 삶도 포기하는 일이 빈발해도 이제는 모두가 이런 처참함에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어디 이런 일 뿐이랴. 효를 숭상하던 동방예의지국에서 노인학대가 사회적 문제가 된지 오래다. 얼마 전에는 손자가 냉대한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할머니도 있었다. 자식사랑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예전 같으면 장유유서의 전통 속에서 젊은이들의 존대를 받으며 여생을 사셨을 우리의 어른들이 이제는 그저 경제력 없는 성가신 존재로 전락했다. 자존감이 낮아진 우리의 늙은 부모들은 길거리를 배회하다 하루에 7명꼴로 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전체 자살률의 2.3배나 되는 수치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혼을 가문의 수치로 여기던 시절이 언제라고 우리 사회의 이혼율은 벌써 30%를 육박해 전 세계적으로 미국 다음이라고 한다. 신혼여행이 곧바로 이혼여행이 되어도 이제는 개탄할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정상인이라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들을 우리는 이웃이라고 부른다. 가깝게는 부모, 배우자, 자녀, 형제, 자매를 포함하는 친척들이 나의 이웃이요, 친구, 학교동문, 직장동료, 거래처들도 나의 소중한 이웃이다. 이러한 이웃들과의 관계로부터 분리된 나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삶은 '너'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있기에 자녀가 존재하며, 남편이 있기에 아내가 존재한다. 학생이 있기에 선생이 있으며, 부하가 있기에 상사가 존재하고, 국민이 있기에 대통령도 정치인도 있다. 소비자가 있기에 생산자가 있으며, 노(勞)가 존재하므로 사(使)가 존재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러한 '너'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나'는 '너'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곧잘 빠진다. 심지어 '너'가 없다면 '나'는 더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너'의 존재가 '나'의 축복인 것을 까맣게 잊고 '너'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른다. 노(勞)는 임금을 올려달라고 목청을 높이고, 사(使)는 낮은 노동생산성만 탓한다. 자녀는 가난한 부모에게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대들고, 아내는 범상한 남편에게 "왜 남들만큼 출세하지 못하느냐"고 불평한다. 그래서 서로에게 축복이 되어야 할 관계가 저주스러운 관계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너'에게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는 탐욕스러운 '나'는 반드시 언젠가는 '너'와 함께 망한다. 암세포도 정상세포도 우리 몸에 속한 세포이지만 암세포는 정상세포에게 돌아갈 영양을 빼앗아 자신이 비대해지는 일에만 골몰한다. 이렇게 비대해진 암세포는 몸 전체가 죽어 종국에는 자신도 몸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진정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일까. 이제부터라도 우리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당신은 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라고 말하며 서로에게 감사하고 격려했으면 좋겠다. 자녀는 부모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사(使)는 노(勞)에게 "나는 당신의 축복이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해 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정 운 오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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