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국민으로부터 단단한 신뢰를 받지 못하면 국정운영이 어렵다. 도덕적 신뢰만이 국정운영의 밑천인데 지금 (최도술 사건으로) 신뢰에 적신호가 켜진만큼 겸허히 국민심판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그는 '겸허'란 말을 썼지만, 재신임 발상 자체가 겸허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10개월 전, 대통령으로 일한 것은 8개월이 채 안 된다. 겨우 8개월 일하고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은 그가 이미 말했던 "대통령 못해 먹겠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지난 8개월 동안 야당, 언론, 보수계층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건수만 잡으면 마구 짓밟아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지지계층인 노조나 진보세력도 북핵, 파병, 파업 등을 둘러싸고 그와 갈등을 빚었다. 참기 힘든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다. 수백건의 선거공약을 내세우고 개혁의 깃발을 흔들며 치열한 선거전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그 정도의 시련을 극복하지 못해 재신임 운운하다니 어이가 없다. 대통령이란 막중한 직책을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정이 순조롭게 돌아간다 해도 대통령에겐 나날이 시련이고 도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도덕적 신뢰만이 국정운영의 밑천"이라는 말 역시 균형감각을 심하게 잃고 있다. 노 대통령은 오랜 측근인 최도술씨가 대기업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노무현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청교도일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국민은 별로 없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데, 그 때마다 재신임을 묻겠는가. 측근의 부패 역시 대통령이 극복해나가야 할 시련의 일부일 뿐이다.
돈과 권력의 유착은 오랜 세월 서로의 이해관계가 뒤얽히며 형성된 끈질긴 관계여서 하루아침에 드라마틱한 결단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돈 없이는 정치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도를 개혁하고 꾸준히 부패와의 전쟁을 치르는 길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재신임을 묻는 방법으로 국민투표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헌법 72조는 외교 국방 통일 등 국가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정책에 대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측근의 부패로 도덕적 신뢰를 잃었으니 재신임을 받겠다는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이미 선언했으니 국민투표 이외에는 이 난국을 수습할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것은 국민투표를 통해 재신임을 얻은들 달라질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에서 개혁신당이 압승하지 않는 한 국회는 여전히 대통령에게 힘겨운 상대일 것이다. 언론도 대통령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 설령 압도적인 재신임을 얻는다 해도 그 효력은 일시적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불신 받게 된 원인이 외부에 있지 않고 대부분 대통령 자신의 행태에서 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행태가 개선되지 않으면 재신임도 그 무엇도 대통령을 도와줄 수 없다.
국정과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국민투표는 심각한 국력낭비다. 이 시대의 몇 달은 전 시대의 몇 년에 버금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세계가 눈부시게 변화하고 있다. 한번 흐름을 놓치면 회복불능으로 뒤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와중에 무슨 재신임이고 국민투표인가. 그것은 이벤트지 해결책이 아니다.
대통령의 재신임 결단은 겸허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고 즉흥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임기를 걸고 신임을 묻겠다는 건데 무슨 소리냐고 화내서는 안 된다. 재신임을 못 받아 임기를 못 채우더라도 이 나라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궤변도 하지 말기 바란다.
한국일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투표가 시행될 경우 노 대통령을 재신임하겠다는 사람이 52%, 재신임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39%였다. 대통령을 재신임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생각할 때 39%의 응답은 무서운 소리다. 39%의 응답에는 승부수로 재신임안을 던진 대통령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어있을 것이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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