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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법정에 선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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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법정에 선 나무들

입력
2003.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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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D. 스톤 지음 허 범 옮김 아르케 발행·1만 5,000원

경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양산 천성산에 사는 도롱뇽이 법원에 소송을 낸다. 예정대로 경부고속철도가 천성산을 통과하게 되면 보금자리를 잃게 되니 터널 공사를 막아달라고.

사람이 아닌 도롱뇽이 어떻게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어쨌거나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공동대표 양산 내원사 지율스님)는 천성산 도롱뇽을 원고로 내세워 11일 '고속철 천성산 터널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을 할 예정이다. 사람이 아닌 생물이 소송 주체가 되는 국내 첫 사례여서 도롱뇽의 원고 자격부터 논란이 될 전망이다. 도롱뇽의 소송 대리인 이동준 변호사는 "터널 공사 때문에 피해를 입은 토끼가 공사중지 요구 소송에서 이긴 일본의 판례가 있다"고 말한다.

국내 초유의 이 소송을 앞두고 번역 출간된 '법정에 선 나무들'(원서 'Do Trees Have Standing? ')은 굳이 가르자면 도롱뇽 편이다. 미국의 법학자인 지은이는 산이나 바다, 강, 동식물 등 자연 스스로가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동차에 들이 받힌 나무가 자동차 주인에게 손해 배상을 요구하고, 인간의 개발 행위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숲이 법적 보호를 요청하고, 오염된 강이 폐수를 흘려보낸 기업을 고발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간중심주의를 확 뒤집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주장이라 귀가 번쩍 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발할 사람들에게 지은이는 자연물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검토하고 그 바탕이 될 환경윤리를 제시한다. 또 이런 생각이 공상에 그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미국과 독일, 일본 등에서 자연물이 원고로 나선 실제 소송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원서 제목의 'Standing'(당사자 적격)은 '소송에서 원고 또는 피고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리킨다. 지은이는 이 개념이 고정불변이 아님을 지적한다. 예컨대 사람만 해도 어린이나 불구자, 정신병자, 흑인, 유대인, 여성,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권리는 오랜 역사적 투쟁을 거쳐 인정된 것임을 환기시킨다. 또 사람이 아닌 기업이나 단체, 국가, 교회 등이 법인으로 인정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식물과 자연도 법률적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물의 법적 권리를 실현할 구체적 방안으로 그는 '지구 후견인 제도'와 '지구 보호 신탁기금'을 제시한다. 지구 후견인 제도는 1992년 리우 환경회의에 몰타 대표단이 제출한 '미래 세대를 위한 후견인' 제도에서 착안한 것으로, 법정에서 직접 발언할 수 없는 자연환경을 대리할 후견인을 두는 것이다. 지구 보호 신탁기금은 공해(公海), 대기, 우주공간 등 소유권자가 따로 없는 지구 공동 지역의 사용에 대해 세금을 물려 그 돈을 지구 후견인의 활동 재원으로 쓰자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통해 위기에 처한 지구 환경을 구하고 미래 세대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본다.

자연물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이 책의 원서는 22년 전인 1971년에 처음 나왔다. 이번 번역서는 1996년 개정판이다. 초판을 냈을 당시 지은이의 주장은 일부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조롱을 받기도 했다. 나무가 사람을 고발할 수 있다면, 내 집 마당에 나뭇잎을 떨어뜨린 이웃집 나무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겠다는 식의 빈정거림이었다. 그러나 그 뒤 자연물이 소송 당사자로 나선 재판들이 실제로 이뤄지면서 이 책은 미국의 주요 로스쿨과 단과대학에서 영감을 주는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번역자인 허범 변호사는 이 책이 "방조제 공사로 파괴 위기에 몰린 새만금 갯벌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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