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이념 갈등은 핵심이 아니다. 그런데도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실제 이상으로 커 보인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들 괴롭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념갈등에 조금이라도 개입하게 된 사람들은 다들 피곤해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피곤하다. 국가적 사안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핵심도 아닌 이념갈등을 피하고 싶어도 피해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진보 편을 드는 듯 하면 보수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있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보수 편을 드는가 싶으면 진보세력의 지탄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이념 갈등이 핵심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선 이념이란 원래부터 본질적인 사안이 되기 힘든 것이다. 이념이란 말 자체가 본디 '무엇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생각'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터인데, 인류 역사상 자신이 처한 입장이나 위치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로 연결되어 싸운 적은 많았어도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갈등의 본질적인 근원이었던 적은 거의 없다.
둘째로 한국 사회에서 발견되는 이념적 스펙트럼이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만큼 넓어 보이지가 않는다. 역사상 다양하게 나타났던 극좌나 극우의 형태들과 비교해보면 오늘 한국의 이념적 차이는 그야말로 '차이'일 뿐, 불구대천(不俱戴天)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의 지나간 1980년대와 비교해보아도 오히려 극좌나 극우는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오늘날 이념갈등의 예라고 적시되어지는 것들의 대부분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한 차이일 뿐, 커다랗고 본질적인 지향에 대한 차이가 아니다. 대북·대미 입장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할 것인가 말 것인가, 친북행위를 한 것으로 판가름 난 외국 국적 학자 한 명에 대한 처벌을 어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다. 그 하나하나로는 중요한 사안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할 성질의 구체적인 문제들일 뿐,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지향의 차이는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의논이 되지 않고 싸움이 된다. 그러니 갈등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 간다고 치자. 부산이라는 목적지가 본질이지, 무엇을 타고 갈지는 본질이 아니다. 누구는 비행기를 선호할 수 있고, 누구는 승용차를 선호할 수 있다. 이것은 좋아하는 교통수단의 차이일 뿐, '너 하고 여행 안가!'라고 선언해야 할 이유는 못된다. 비행기를 탈지 승용차를 이용할지, 아니면 제3의 대안으로 열차를 선택할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할 수 있다.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승용차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비행기를 선호하는 일행을 위해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가을 들판의 경치 감상을 포기할 용의가 있을지 모른다. 비행기를 선호했던 사람은 그 보답으로 점심이라도 한턱 낼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지가 분명치 않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굳이 비행기를 고집하는 상대를 보면서 '부산 간다 해놓고 제주도 가려는 것 아니야?'라는 의심이 들게 된다. 비행기 타기를 원했던 사람은 그 사람대로 굳이 승용차를 고집하는 상대를 보면서 '중간에 맘 바꿔서 설악산 가려는 건 아닌지' 의혹을 품게 된다. 혹시 상대방 고향이 설악산 근처이기라도 하다면 의혹은 어느 순간 확신이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막상 즐거운 여행은 간데 없다. 별로 이념적 차이도 크지 않으면서 보수라고 불러도 될 상대를 보수반동이라 부르게 되고, 진보라고 불러도 될 상대를 극렬진보라 부르게 된다. 쓸데없는 의심과 갈등을 키우지 않으려면 목적지가 분명해야 하고, 목적지를 분명히 하는 것은 리더십의 몫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갈등은 핵심이 아니다.
장 덕 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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