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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 항쟁까지]<21>민청학련(中)-"붉은폭력단"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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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 항쟁까지]<21>민청학련(中)-"붉은폭력단" 기획

입력
2003.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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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4호가 발표된 1주일 후인 4월 14일 나와 이철은 신설동에 있는 여정남(呂正男·전 경북대 정사회 회장·75년 4월 9일 인혁당재건위 관련 사형 집행)의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라디오 뉴스를 듣던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아니 200만원이라니' '셋이 합쳐서 그렇겠지. 간첩을 잡아도 30만원인데….' '네가 잘못 들었어.' '맞다니까….' 우리의 다툼은 1시 뉴스에서 바로 해결됐다. 나와 이철 강구철(姜求哲·당시 서울대 정치학과3년) 셋이 1인당 200만원씩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발표였다. 대학생 3명을 잡거나 신고하면 간첩 20명분의 현상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여정남이 숟가락을 놓았다.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은 자멸 행위인 것 같소. 일단 헤어지고 모레(16일) 어린이 대공원 뒷문에서 만납시다'고 말했다. 하숙집을 나서니 모든 전신주, 담벼락, 시내버스에 현상수배 전단이 붙어 있었다. 그날 밤 길거리를 전전하다 공중전화에서 후배에게 전화를 걸고 나오다 붙잡혔다(여정남은 다음날 대구에서 검거). 그들은 나의 신분을 확인한 뒤 '만세'를 불렀다. 남산으로 끌려 갔더니 이미 나를 중심으로 '붉은 폭력단'의 계보도가 완성돼 있었다. 배후를 물어 할 수 없이 우리들 고정 멤버인 서중석(徐仲錫·당시 서울대 사학과4년·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을 댔더니 그들도 웃어버리더라."-유인태(현 청와대 정무수석)씨 증언.

73년 '10·2 시위'로 시작된 학생들과 정보당국의 긴장은 4월 3일을 향해 팽팽히 부풀고 있었다. 학생들은 전국 대학 총궐기의 D데이로, 당국은 운동권에 대한 일망타진의 D데이로 잡고 있었다. 결국 '4·3 데모'와 긴급조치 4호로 가시화 했다.

서울대(문리대-법대-상대) 서울(서울대-연세대-고려대) 전국(서울-대구 경북대-광주 전남대)을 연결하는 소위 '3-3-3 원칙'을 세우고 지방과 서울에서 시범적 데모를 벌이기로 했다. 경북대의 여정남이 자진해서 선봉에 서겠다고 했다. 74년 3월 21일 첫 시위가 대구에서 발생했다. 서울에서는 28일 서강대가 가두진출을 시도했다. 서강대 시위가 있던 날 당국은 서둘러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민청학련 4인방 중의 한 명인 서중석 등 대학생 80여명이 이날 밤 검거됐다. 4월 3일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시각 정부에선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이어 시위 학생들도 모르고 있던 민청학련이란 이름에 기대어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됐다. 4월 24일 전국투쟁 현장책임을 맡았던 이철(李哲·서울대 사회학과 68학번·전 국회의원)씨가 검거되자 다음날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이철씨의 설명. "우리는 인혁당의 하수인이었으며, 일본 공산당과 공모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화염병으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려 한 혐의로 기소됐다.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을 할 때부터 여정남을 만났다. 각 대학 이념서클이 번갈아 가며 전국 규모의 합동 토론회나 세미나를 가졌는데 경북대 대표가 여정남이었다.

강제 입영을 거쳐 제대복학 후 4·3 데모를 구상하면서 다시 만났다. '3-3-3 조직'의 일환으로 그로부터 대구·경북 지역 동지들을 소개 받았다. 인혁당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다. 조사 과정에서 우리가 그들을 지휘한 것으로 됐다가 다시 인혁당이 민청학련의 배후가 되는 등 한동안 왔다갔다 했다.

일본 공산당과 관련, 73년 성탄절 전날 제일교회에서 유인태와 함께 일본인 프리랜서 하야카와 요시하루(早川嘉春)와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를 만나 학생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의 기사를 쓰고자 했고, 다음날 정릉에 있는 하야카와의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한국 학생들은 너무 낭만적이다. 일본 공산당처럼 무장도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인을 만나면 공산주의자로 조작될 가능성이 있겠다며 이후 만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를 '빨갛게' 물들이기 위해 사상문제를 집중 추궁했다. 그들은 내가 학교에서 쓴 '테러리즘에 관한 평가'라는 리포트를 찾아내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그 리포트의 제목은 담당 교수가 지정해 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리포트에 관해 분석을 의뢰, 당시 반공연맹 이사장이었던 S교수의 주석까지 붙여 놓았더라. 주석에는 '공산주의자로서 폭력 혁명을 선동하는 탁월한 논문'이라고 돼 있었다. 기가 차는 노릇이었다.

모종의 '폭발물'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펑 소리와 섬광을 내는 사진관 플래시에 착안, 공과대학 후배들과 함께 '폭발물' 실험을 하기도 했다. 페니실린 병(엄지손가락 크기의 주사약 병)에 마그네슘 등을 넣고, 실을 꼬아 성냥개피 황을 긁어 붙여 도화선도 만들어 보았으나 실패했다. 일부 후배가 만들기 쉽고 화력도 좋은 '진짜 화염병'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거절했다. 인명피해가 우려됐고 폭력혁명으로 몰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중정 프락치'의 존재를 증언한다. 당시 학생회 간부였던 K와 L의 경우 그들의 알려진 역할과는 달리 기소 전에 석방됐다.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이종구(李鐘久·성공회대 사회학과 부교수)씨는 "조사를 받는 도중 수사관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 수사관이 '검찰에 보내는 서류에 그들은 민청학련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중정 조정관의 지시에 따라 공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석방 조치 바란다고 썼다가 문제가 되었다'고 투덜댔다. 그러자 다른 수사관이 '수사에 협조하고 반성과 개전의 정이 뚜렷하다'로 수정하라고 지시하더라"고 증언했다.

이철씨도 "그는 우리의 비밀 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가 참석했던 회의 내용은 정보부가 모두 알고 있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동지들은 항상 현장에서 검거됐다. K, L 등은 지금이라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내가 물고문을 당하는 옆에서 그는 '엎드려 뻗쳐' 기합을 받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민청학련 4인방 서중석씨

박정희가 여정남과 도예종 서도원 등 8명을 인혁당 재건 혐의로 몰아 유신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발표 때였다. 하지만 형이 확정되자마자 처형하기로 마음을 결정한 시점은 75년 2, 3월이었을 것이다. 74년 2학기 들어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은 긴급조치 하에서도 더욱 거세졌다. 특히 정의구현사제단이 조직되는 등 종교계의 저항이 본격화했다. 결국 박정희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75.2.12)를 승리로 이끈 뒤 15, 17일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했다. 그러나 김지하에 의해 인혁당 관련자의 살인적 고문 사실이 폭로되고,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또 석방된 학생과 사회인사들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무등을 탄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언론에 크게 실렸다. 이를 보면서 박정희의 협량한 단기(短氣)가 발동됐을 것이다. 3월 하순부터 다시 대규모 반유신 데모가 시작됐다. 75년 4월 9일의 사법 살인, 그들은 음모자들의 권력 광기에 희생됐다.

69년 3선 개헌을 반대하다 검거됐는데 풀어주며 영장을 주더라. 사흘 뒤 입영했다. 72년 제대 복학하니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10·2 시위 등을 거치면서 이철 유인태 나병식 등 동지들과 정례 모임을 가졌다. "박정희 정권은 무지막지한 집단이다. 학생들 만으로는 힘이 부족하다. 여러 계통의 민주세력을 모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철과 유인태가 전국의 대학을 맡고, 나와 나병식이 '대학 외'를 담당키로 했다.

그 해 4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계가 반유신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형규 목사와 서경석 목사를 만났다. KSCF의 황인성과도 협력했다. 이후 기독교계는 나병식이 담당했다. 원주를 오가며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 김지하 등을 만나 시국을 논의하고 공감대를 확산했다. 당시 원주는 노동·농민운동이 치열하게 불붙고 있었다. 중앙일보의 유근일씨를 만나 해외 관련 정보도 듣고 돈도 얻었다.

김지하를 고리로 조영래를 축으로 69년 3선개헌 반대 데모를 했던 학생 출신들을 묶을 수 있었다. 유홍준(兪弘濬·54·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을 통해 문화계 인사들도 접촉했다. 또 선배로부터 정치인도 소개 받았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 등과 공감대를 확인했다.

74년 초에 들어서면서 정보부가 우리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조사를 받으면서 안 일이지만 그들은 나와 이철 유인태의 경우 거의 1일보고 형태로 체크하고 있었다. 그들은 '큰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를 살살 몰고 다닌' 꼴이었다. 우리도 '조심하자. 빨갱이로 몰리지 않도록, 폭력혁명으로 몰리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수없이 다짐했다. 우리와 중정 간에 '서로 알고 하는 게임'을 벌인 셈이었다.

4월 3일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28일 서강대에서 스타트를 끊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충남 강경에 있는 고향집에 내려갔다. 하룻밤 자고 은둔에 들어갈 참이었다. 밤 12시쯤 쾅쾅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된장과 쌀을 싸놓고 막 잠들었을 때였다. 강경경찰서를 거쳐 서울 남대문경찰서로 압송됐고, 남산 중앙정보부 6국으로 갔다.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고 "이철과 유인태는 어디 있느냐" "계획을 순순히 털어 놓아라"고 다그쳤다.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며칠 후 조사관이 "이제 너희들 다 죽게 됐다"며 신문을 던져 주었다. 긴급조치4호가 발표되었더라. 사안이 심각하다고 여겼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고문만은 이겨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공중에 매달아 놓고 물고기처럼 물을 먹이는 고문이 매일 이어졌다. 이철 유인태의 행방과 화염병 제작, 조직망 등을 캐물었다. 나의 역할을 알고 있었던 듯 재야인사 선배 원로들과의 연계를 중점적으로 추궁했다.

유인태가 검거(4월 14일)된 후 다시 나를 지하실로 끌고 갔다. 한 동안 '물고기 고문'을 한 뒤 갑자기 "너 이북 갔었지"하고 물었다. "여정남을 언제 만났느냐, 서도원과 도예종을 아느냐"고 물었다. '아, 예상했던 대로 빨간 칠을 하려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그 동안 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느냐,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하자 그들도 웃고 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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