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일본의 한 잡지에 보도된 옛 만주 땅 조선족 동포사회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연변 자치주 수도 연길의 중앙역 천장에 한글로 '연길역'이라 쓰고 옆에 있는 한자 표기를 보고 어떻게 중국 땅에 한글 간판이 붙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 이름까지 일본식 통명(通名)을 쓰는 재일동포 사회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역 이름 뿐이 아니었다. 가게의 수 많은 간판들은 예외 없이 한글이 먼저고 뒤에 한자가 따라가는 길거리 스케치 사진은 그곳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한 눈에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 처음으로 그 땅을 밟았을 때 사진과 기사로 느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정겨운 함경도 사투리와 평안도 억양은 우리가 조금 전까지 어깨 걸고 함께 살아온 형제였음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중국화 한 한글의 어색함, 인력거와 우마차가 다니는 거리풍경, 북쪽에 기운듯한 정신의 내면 등은 우리를 '남조선 사람'이라 부르는 호칭만큼이나 낯설었다. '프라이드'와 닮은 승용차에 적혀있는 출조(出租)가 택시를 의미했다. 복무원이니 공작이니 하는 어휘들도 귀에 설었다. 부지런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접대를 받고 돌아서면 왠지 허전해지는 것은 그런 낯선 말들 때문이었을까.
■ 5년 뒤 다시 찾은 연변은 너무 변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서울 직항로와 서울 청소년 문화의 홍수였다. 창춘(長春)을 경유해 들어오던 하늘 길에 주 3회 직항편이 생긴 것은 한국과 연변의 교통량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상징한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돌아오는 아내와 딸을 껴안고 울고 웃는 모습은 지난 날 파독광원이나 간호사, 또는 중동 근로자들이 돌아오던 김포공항을 연상시킨다. 더 달라진 모습은 연길 중심가에 있다. 행인들의 옷차림과 표정, 몸짓만으로는 이제 여기가 사회주의 나라임을 짐작하기 어렵다. 주현미와 조용필이 독차지하던 편집된 서울 TV화면은 서울의 댄스그룹싱어들 독차지다.
■ 더욱 놀라운 변화는 연길시내 요소요소에 나붙은 이승철 라이브 공연 홍보물. 18일부터 시작되는 이 공연은 연변 동포사회 젊은이들 가슴에 조바심의 모닥불을 지폈다. 1990년 당국의 제지 때문에 주현미 공연을 새벽 1시에 개최한 그 행사 기획자들도 한국의 대중문화 소비층의 급격한 연소화를 놀라워 하고 있다. 탈 농촌과 대도시로 돌아앉은 젊은이들 마음, 결혼기피현상과 출산기피 풍조 등은 우리가 겪어온 길을 한 두 걸음 뒤에서 답습하고 있다. 급속히 변해가는 연변의 모습이 반갑지만 않은 이유다.
/연길=문창재 논설위원실장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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