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면서 가장 성가신 일 중 하나는 판촉전화를 받는 것이다. 처음엔 영어도 익히고 미국의 일상사도 엿볼 겸해서 '상냥하고 친절한'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가 늘어나면서 그런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깨닫게 된다.섣불리 응대했다가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권유하는 판촉원에 걸려들어 시간을 뺏기는 것은 예사고, 달콤한 꼬드김 속에 소비자의 주머니를 터는 '감춰진 비용'이 들어있는 것을 알지 못해 낭패를 당기도 한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과 비례해 판촉 전화 끊는 요령도 늘어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장거리 전화회사의 교체 권유 등을 잘만 이용하면 생활비를 절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지금 미국에선 정부와 전화판촉업자 사이에 '두-낫-콜-미(Do-not-call-me)' 명단 등록을 둘러싼 법적 논쟁이 한창이다. 소비자 권익 보호를 앞세워 판촉 전화를 규제하려는 정부측과 이를 기업 활동의 자유 제한 조치라고 반발하는 업계간의 싸움은 일단 정부측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당초 연방거래위원회(FTC)를 통해 판촉전화를 규제하려다 법원이 자선 요청 전화와의 차별성을 이유로 제동을 걸자 실행기관을 연방통신위원회(FCC)로 바꿀 정도로 '전화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명단 등록에 적극적이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전화판촉금지법안에 서명, 텔레마케팅 업자들의 손발을 묶어 버렸다. 이제 업자들은 판촉전화 불원(不願) 명단에 등록된 번호로 전화할 경우 건당 최고 1만1,000 달러의 벌금 외에 소비자로부터 건당 500 달러의 손해배상 청구를 감수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들여다보면 부시 정부는 소비자만을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한꺼풀 더 벗기면 부시의 행보에는 내년 대선을 위한 노림수가 깔려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6월부터 정부가 '두-낫-콜-미'명단 등록을 받기 시작한 이래 5,100만 번호가 접수됐다. 앞으로도 이 명단은 더욱 불어날 전망이다. 유권자들의 표심에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부시 대통령이 마다할 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모든 정책이 선거로 통하는 대선의 계절로 접어들고 있다.
김 승 일 워싱턴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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