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인간의 상상력이 잡아먹기 위한 먹이다"라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상상력은 세계를 원형 그대로 놓아두는 일이 없다. 원형 그대로 놓아두기는커녕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비틀어놓거나, 보통의 눈으로 보면 통상적이 아닌 방법으로 짝지어놓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그만큼 새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상상력의 작용이 없으면 세계의 모습은 그냥 그대로 유지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새로워질래야 새로워질 수가 없는 그런 세계를 나는 싫어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것이 내게는 시를 쓰는 일의 큰 줄거리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죽기살기로 해보아도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이미 만들어진 사물과 세계를 내가 어찌 내 마음대로 만든다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 일을 하려는 것은 쉽게 말하면 팔자 소관이고, 어렵게 말하면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팔자 소관이든 운명의 소치든 간에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움은 처음부터 충분히 예견되었던 일이라 하겠다. 그런 만큼 거기에는 그 불가능함을 한탄하는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시를 쓰는 것은 한탄을 딛고 선 허망한 놀이인 것이다.
'놀이'라는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것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행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인생 자체도 그 놀이에 포함될 수 있다. 시나 예술도 물론 고급한 놀이의 일종이다. 호이징거는 실제로 예술을 놀이라고 주장하는 유명한 책을 냈다.
보들레르의 말대로 상상력이 세계를 먹이로 한다면, 세계는 마땅히 원래의 그것과는 바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질 것인가. 일차적으로는 세계를 내 마음에 드는 대로 바꾼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개성적인 세계의 변용이다.
그러나 아니다. 우선 나에게는 일일이 들자면 한이 없을 만큼 허다한 인간적 한계가 있다. 그 한계에 따르는 절뚝거림은 나의 인생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 내가 무슨 대단한 재주를 가졌다고 시를 쓰고, 그리하여 세계를 새로 만든다 할 것인가. 인간은 모두 시를 쓸 있는 존재이고 따라서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이다.
두루 알다시피 시는 언어로 쓰여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는 일정한 길이를 갖는 언어의 조직인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상상력이 일정 분량 침투한, 의미를 담는 그릇이다. 일반적으로는 그 언어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풀이한 책이 사전이다. 그러면 사전에 풀이된 언어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자.
사전은 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과학적으로 옳다고 해야 할 풀이이다. 그러나 이렇게 풀이된 물만이 물인가 하고 다시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이기는 하지만 가뭄에 시달리는 농부의 물일 수는 없고, 또 홍수가 하루아침에 논밭을 휩쓸어 가버린 끔찍한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물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전에 풀이된 언어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이고, 사전이 아닌 다른 쪽의 의미는 주관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다가 언어의 의미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 중에서 상상력이 끼어들어 있는 것은 주관적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주관적 의미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말하는 사람, 즉 화자의 인간적 조건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사물과의 교섭이요 그 사물의 전체적 종합인 세계와의 교섭이다. 이 교섭이 이룩하는 삶의 주체인 나의 실존의 근거가 되는 특수성을 사전의 의미는 받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싫든 좋든 마치 농부가 그러하듯 사전의 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한 가지 꼭 밝혀두어야 할 것은 주관적 의미가 존재하는 그 자리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생명수로서의 농부의 물'은 상상의 공간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가 사전의 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곧 세계를 상상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적 이해의 규모를 넓히는 것으로 종교적인 차원의 세계 이해가 나올 수 있다. 이를테면 예수가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또 그것은 여호와의 뜻이었다는 기독교적 세계 해석이나, 만유는 인연에 의해 생멸할 뿐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실은 그 실체 없음이 곧 실체라는 불교적 세계 해석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물을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로 보는 사전적 이해는 이런 상상적 이해 앞에 도저히 나설 수 없다.
시인은 그러한 상상적 이해를 통해 세계를, 아니 그 세계의 감추어진 비밀의 핵심을 제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러자면 시인은 호랑이 새끼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가듯 자기의 실존의 심혼을 세계의 핵심부에 투영해야 할 것이다. 그때 세계는 비로소 시인의 상상력이 먹고 소화할 수 있는 먹이가 된다.
상상력에 의해 소화되기 이전의 세계는 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이 상상력을 보들레르는 다시 "인간의 모든 능력의 여왕"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상상력을 통해 나는 세계를 새롭게 바꾸려 한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슬픈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계는 내가 바꾸려고 한다면 "오냐, 그러마"하고 쉽게 바뀌지가 않는 것이고, 또 그렇게 바뀌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바꾸려고 하는 슬픈 감정, 모순된 감정이 뒤섞여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시에는 한편으로는 노여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상상력은 사물과 세계를 새로 만드는 일을 낳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사물과 세계를 새로 해석하는 일이다. 가령, 저기 있는 저 엄청난 분량의 소금물을 어째서 '바다'라고 하는가. 그것이 바다라고 불리기 이전에도 그것은 거기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때의 그것은 우리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 정체불명의 괴물을 바다라고 이름붙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사물과 세계한테 언어를 부여해서 그것을 해석한다. 해석은 한 번으로 그쳐야 하는 법이 없다. 어제의 해석은 오늘의 해석으로 대체된다. 언제나 새로 시도될 수 있고 또 새로 시도되어야 할 것이 해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당연한 사리를 몰각하고 이미 내려진 해석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다. 이런 착각의 결과가 나쁘게 말하면 통념이요 조금 온당하게 말하면 상식이다. 이런 통념과 상식을 초극하려는 데 나의 시, 아니 시의 지향점이 있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려 보면 현실은 언제나 이런 지향을 배반하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나의 재주 없음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큰 원인은 나의 성정이 터무니없이 여려서 한결같지 못하고, 따라서 자주 흔들린다는 흠을 지닌 데 있다. 아니, 다른 것도 있다. 사람이 너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형편무인지경이라는 점도 들어야 하겠다. 시인 노릇 제대로 하자면 시와는 무관한 것 같은 이런 조건도 갖추어야 하고 또 그밖에 이런저런 조건까지 두루 갖추자면 이제는 나이가 너무 늙지 않았느냐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서 끝까지 시인 노릇 해보겠다는 나를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팔자 소관으로 보아준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 연보
1933년 경남 진주 출생 1950년 월간 '문예'에 시 '강가에서' 등 추천 등단 1956년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연합신문·동양통신·서울신문 기자, 국제신문 편집국장, 부산산업대·동국대 교수 등 역임 시집 '적막강산''꿈꾸는 한발' '풍선심장' '그해 겨울의 눈' '죽지 않는 도시' '절벽' '별이 물이 되어 흐르고' '심야의 일기예보' '보물섬의 지도' '오늘의 내 몫은 우수한 짐' 수필집 '서서 흐르는 강물'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평론집 '감성의 논리' '한국문학의 반성' 등
한국문학가협회상(1959) 한국시인협회상(1976) 한국문학작가상(1982) 윤동주문학상(1985) 대한민국문학상(1990) 대산문학상(1994) 대한민국예술원상(1999) 만해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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