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철학계의 연중 최대 잔치인 한국철학자대회 2003년 행사가 10일부터 사흘 동안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다. 한국철학회가 주관하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회 등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대회는 그 동안 국내 철학계가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민족'을 주제로 삼아 눈길을 끈다. 참여 학자만도 연 1,000명에 이르러 16년 대회 사상 최대 규모가 될 전망이다.이번 대회 주제인 '탈민족주의 시대의 민족 담론'은 세계화를 지향하는 탈민족주의 시대에 아직도 민족을 철학적 담론으로 삼아야 하는 우리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세간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민족 문제는 그 동안 사회과학이나 문학의 전유물이었을 뿐 철학계는 너무 무관심했다는 자성도 제기된다.
'탈민족주의 시대의 민족 담론―열린 민족주의를 향하여'를 기조 발제하는 엄정식 한국철학회장은 "메타 학문이라는 철학의 성격상 그 동안 전개된 민족 담론을 총정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발표자들에게 자신이 분단 시대를 살아오면서 철학자로 서 체험한 것을 담아 글로 표현하도록 요청했다"고 말했다.
주제가 시사적인 것이어서 발표자들을 굳이 철학자에 한정하지 않고 대회 첫 날 정치학자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이 '최근의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와 한민족의 위치'를 발표하는 것도 이채롭다. 민족과 분단의 고통을 견뎌낸 학자의 체험이 생생한 글은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씨와 윤건차 일본 가나가와대 교수의 글이다.
송씨는 '분단의 체험 공간과 통일의 기대 지평'을, 윤 교수는 '재일동포의 민족 체험과 민족주의'를 발표한다. 송씨는 당초 자신이 경계인으로 살면서 느낀 점과 세계화 시대에 남북한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직접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여건상 불참할 가능성이 높다.
또 이삼열 숭실대 교수가 '통일 논의에서 본 민족과 평화'를, 남경희 이화여대 교수가 민족 담론에서 언어의 문제를 살핀 '언어의 착근성과 일항성―자유 민주주의와 민족 담론에서 언어'를 발표한다.
대회 둘째날에는 한국여성철학회, 철학교육연구회, 한국과학철학회, 양명학회, 서양근대철학회 등 19개 학회의 분과 회의가 장소를 달리해 이뤄지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관련 자유 발표도 진행된다. 발표 논문은 300쪽 짜리 자료집 3권으로 묶여 대회장에서 판매된다.
마지막 날에는 슬로베니아의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류블랴나대 교수의 특별 강연이 준비돼 지젝은 이날 '파국과 함께 살아가기'라는 주제로 모든 이론 체계와 객관성, 실재성, 합리성이 무너져가는 시대를 '파국(Catastropy)'으로 보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민족 갈등과 분단 구조도 논의에 포함된다. 이와 관련 지젝 교수는 "슬로베니아와 한국은 강대국 때문에 고통 받았고 시민혁명이나 운동을 통해 정상의 궤도를 찾은 경험이 비슷해 강한 연대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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