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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 설악에 취했다 아! 붉은 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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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 설악에 취했다 아! 붉은 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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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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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거세지는 않다. 그렇지만 발길을 멈추기로 했다. 비를 맞으며 걸음을 옮기는 산행이 청승맞기도 하거니와, 그냥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발 1,500m가 넘는 설악산의 소청산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풍진(風塵) 세상이 아니었다. 비구름 사이로 칼날 같은 돌봉우리들이 순간순간 비치고, 멀리 북녘의 백두대간이 파도처럼 다가온다. 젖어있기는 하지만 바람은 얼마나 깨끗한지….비가 멎고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습이 또 달라진다. 곳곳에서 붉은 폭죽이 터지고 있다. 얼마나 선명한지 눈길을 주기가 겁이 날 정도다. 그 불길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조만간 산 아래까지 붉은 기운으로 덮일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무한한 행복감에 빠진다.

설악동(강원 속초시)에서 출발했다. 설악산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나다는 천불동계곡을 타고 정상인 대청봉에 오르기 위해서다. 비선대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지만 50분 정도 뚜벅뚜벅 걸으며 워밍업을 하기에 제격이다. 산채와 동동주를 파는 상가를 지나면 비선대가 나타난다. 일반 관광객들의 설악 여행 종착지이다. 바람의 열기는 많이 식었어도 비선대의 풍경은 아직 여름이다. 녹음이 제 색깔을 잃지 않고 있다.

비선대 위로는 뚜벅뚜벅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엉금엉금 기어야 한다. 거친 돌 봉우리 사이로 물이 흐른다. 아주 위험한 구간은 쇠기둥을 박고 다리와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양폭산장을 지나면서 주위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골짜기가 아니다. 하늘을 향해 삐죽 솟아 있는 계곡의 돌봉우리 정상 부근에 붉은 단풍이 머리띠처럼 둘러져 있다. 함께 걷던 사람들의 고개가 계속 뒤로 젖혀진다. 그러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천불동 계곡의 물소리를 뒤로 하면서 희운각으로 오른다. 머리를 젖히고 바라보았던 단풍이 이제는 눈앞에 있다. 특히 희운각 대피소 입구의 단풍 색깔이 짙다. 마침 맑은 가을 햇살이 단풍 숲으로 비친다. 빨강색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저렇게 빛날까. 사람들의 얼굴까지 붉게 반짝인다.

희운각 계곡물로 수통을 채운다. 정상에 이르기까지 마지막으로 만나는 물이다. 희운각에서 소청봉 사이는 공포의 언덕이다.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올라야 한다. 10보를 오르면 숨을 다스려야 한다. 천불동 계곡 코스가 가장 아름답지만 대부분 하산 코스로 계획을 잡는 이유는 바로 이 구간 때문이다.

자주 쉬어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아본다. 공룡능선과 화채봉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정상 부위는 완전히 불이 붙었다. 공룡능선을 타는 등산객들이 보인다. 돌봉우리 사이를 돌아돌아 힘겹게 올라간다. 보기만 해도 땀이 흐른다. 멀리 보이는 파란 바다가 뜨거움을 식힌다.

드디어 소청봉. 95%를 이룬 셈이다. 소청봉에서 중청봉을 거쳐 대청봉에 이르는 길은 완만한 능선길이다. 중청봉을 지날 때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린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의 헬기이다. 자기 몸집보다 더 큰 짐을 매달고 와서는 중청대피소 앞마당에 떨구어 놓는다. 생수, 컵라면, 과자 등등. 단풍 산행객이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옮겨 놓는 작업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직영하는 중청대피소는 만원이다. 미리 예약을 받기 때문이다.

하산하기에는 빠듯한 시간. 조금 떨어진 소청산장에 여장을 풀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소청산장은 선착순으로 손님을 받는다. 소청산장에서는 발 아래의 풍광이 좋다. 정말 용의 이빨처럼 생긴 용아장성이 펼쳐져 있다. 용의 이빨에 핏빛이 어리면(단풍이 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팔도를 누비며 풍경을 담는 사진작가들이다. 20여명이 무거운 촬영장비를 지고 산장을 들락날락한다.

하산길은 백담사 코스. 천불동 못지 않게 아름답고 신비롭다. 9부 능선에 봉정암이라는 절이 있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많은 불자들이 이 적멸보궁을 찾는다. 산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젊은이들만이 아니다. 60, 70대 노인들도 오른다. 동네 마실 가기도 힘든 다리를 옮겨 산에 오른다. 새삼 종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신비로운 산길이다.

용아장성의 기슭에 위치한 봉정암은 이미 붉은 부처의 세계이다. 사위를 둘러보아도 모두 단풍이다. 법당과 5층석탑만 있던 작은 절이었다. 신도들이 자주 찾으면서 이제는 큰 절이 됐다. 지금도 더 큰 절이 되기 위한 불사가 한창이다. 자재를 옮기는 헬기 소리가 요란하다.

봉정골(일명 깔딱고개)을 힘겹게 내려가면 구곡담과 수렴동 계곡을 만난다. 천불동과 마찬가지로 돌과 물의 세계이다. 계곡의 물이 푸르지 않고 붉다. 주위의 단풍 때문이다.

오를 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곳이 소청봉이라면 내려갈 때 그런 곳이 수렴동 대피소다. 수렴동부터 백담사를 거쳐 하산하는 길은 거의 평지이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다시 여름을 만난다. 붉은 색에 취해 있던 눈이 아쉬워한다.

백담사 앞의 계곡에 성급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저 혼자 붉게 물들었다.

뾰족구두를 신은 한 여자가 그 단풍을 보고 거의 기절할 정도로 좋아한다. 나무 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온갖 표정을 다 짓는다. 저렇게 좋을까. 하지만 저 구두를 신고 산을 오른다니…. 신발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10월4일 설악산=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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