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흔 넷이야. 올해는 안 죽을게." 1995년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45년 만에 아들을 만난 노모의 감회다. 아들의 이름은 기네스북에 최장기수로 기록됐던 김선명(78).김선명의 실화를 연대기 순으로 따라가며 만든 드라마 '선택'(감독 홍기선)의 마지막 대목은 목이 메인다. 정직하게 김선명의 삶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멈추고, 김선명과 노모의 재회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나오는 순간이다. 스물 여섯에 유엔군에 생포된 이후 일흔까지 감옥에서 인생을 보낸 그의 굴곡진 삶과 회한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이다.
'선택'은 무거운 이데올로기로 관객의 뇌리를 짓누르는 영화가 아니다. 비전향 장기수를 찬양하거나 북한 체제에 동조하는 영화도 아니다. 바보 같을 정도의 순정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한 사람의 삶을 가감 없이 감동적으로 그려낸 전기 영화다. 김선명이라는 이름 대신 3596이라는 번호로 불렸던 한 수인의 45년 간의 감옥 생활이 영화의 전부지만, 감옥 안에서 생사의 선택을 놓고 힘겹게 싸우는 비전향 장기수의 드라마는 꽤 힘 있는 울림을 전한다. 카메라에 진실을 담으려는 안간힘이 곳곳에 선명하기 때문이다.
벽에 암호를 두드리는 '통방'으로 희망과 우정을 이어가는 장기수의 일상이 매우 그럴 듯하다. 인간 이하의 환경 속에서 썩은 빵이며 작은 무 하나도 소중하게 주고 받으며 서로를 독려하는 모습이 애틋하다. 화장실과 식기, 교도소 관행의 변화를 통해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기법도 훌륭하다. 독방에서 홀로 환갑을 맞은 김선명에게 동료들이 식기 투입구로 모두 손을 내밀어 손수건처럼 흔드는 대목은 신념을 지킨 한 인간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갈채다.
홍기선 감독과 이맹유 작가는 비전향 장기수 출신이 거주하는 '만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어렵게 증언을 얻어 냈고, 이를 토대로 김선명이 출소한 신대전 교도소를 비롯해 서대문 형무소와 구 수도여고 교사에 지은 세트에서 촬영했다. 24일 개봉.
/이종도기자 ecri@hk.co.kr
A 6주연맡은 김중기
영화 '선택'에서 장기수 김선명 역을 맡은 김중기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로 데뷔했지만 아직 눈에 선 배우다. 비전향 장기수 하면 떠오르는 골수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옳다고 믿으면 끝까지 밀고 가는 꼬장꼬장한 선비형의 인물"을 그려냈다. 그가 목에 힘을 빼고 만든 김선명이란 역할은 퍽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사상이 좌냐, 우냐를 떠나서 40년 이상을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애썼다는 점이 가슴에 다가왔다"는 게 영화를 선택한 이유다. 김선명의 삶을 조금은 닮은 배우의 궤적도 연기에 큰 보탬이 됐다. 전대협 남북청년학생회담 남측 대표단장을 맡았고 그로 인해 3개월 간 옥고도 치렀다.
"청년부터 노년까지 연기한다는 게 내겐 하나의 도전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그러나 겨우 3개월 독방 생활을 하고서 23년 독방 생활을 한 분을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수감됐을 때는 운동시간도 많이 줬고, 운동시간에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며 감옥 생활을 회상했다.
김중기는 간수 취임식 때 48시간 동안 연속으로 찍은 기억을 가장 어려운 장면으로 떠올렸다. 만약 그가 김선명의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조심스럽게 "나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통일을 바라지만 목숨을 걸고 신념을 지킬 자신은 없다는 고백이다. 그는 노모가 김선명에게 "네가 어른 말을 안 들어서 그렇(게 고생했)다"고 말한 대목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지만 인생의 보편적 진리를 담은 말 같아요."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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