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은 마음 속의 은밀한 판타지를 투영하는 거대한 거울이다. '버스데이 걸'(Birthday Girl) 은 추할 수도 있는 판타지를 예쁘게 비추는 영화다. '미의 여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니컬 키드먼이 환상을 아낌 없이 만족시켜 주고, 곳곳에 숨은 반전은 잔재미를 준다. 관객의 성적 판타지에 대해 버릇 없이 비난하는 법도 없다. 오히려 그런 은밀한 환상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추긴다. 할리우드 영화 치고는 싼 제작비인 1,300만 달러로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은행원 10년 차, 과장 승진 심사 탈락, 10년 근속 덕분에 금고 열쇠 보관자로 임명되지만 그 자리가 '꽃보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취미는 변태 비디오 시청과 인터넷 서핑. 런던 교외에 사는 존 버킹검(벤 채플린)은 낮의 지루한 일상과 밤의 성적 판타지를 오가는 고독한 현대인이라는 점에서 관객과 아주 가까운 인물이다.
벤은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로부터 사랑을'이란 웹사이트에서 얼굴도 모르는 신부를 주문한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팔등신 미인이 날아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던 사이트의 보증과는 반대로 나디아(니컬 키드먼)는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한다. 대신 나디아는 설거지를 하고 스웨터를 짜고, 심지어는 벤이 오매불망했던 침대에 묶고 섹스하기까지 주도하면서 벤의 마음을 앗아간다. 웹 서핑을 하면서 누구나 꿈꿨을 매혹적 판타지 아닌가. 나디아가 러·영 사전을 힘겹게 뒤적이며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고 벤에게 말할 때는 감동까지 밀려올 지경이다.
웹 서핑의 판타지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현실로 귀결되듯, 벤의 판타지 또한 쉽게 허물어진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나디아의 러시아 사촌 형제 유리(마티유 카소비츠)와 그의 친구 알렉세이(뱅상 카셀) 때문이다. 러시아어를 못하는 프랑스와 호주의 배우들이 엮어내는 상황, 기타와 빨간 스웨터 등을 이용한 아기자기한 복선이 꽤 볼만하다. 감독 제즈 버터워스. 18세 관람가.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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