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시대 로마의 세력 확장에는 로마군단이 원동력이었다. 징병제 시민병으로 구성돼 강한 자긍심과 전투력을 지녔던 로마군단은 그러나 멀리 게르마니아에 이른 방대한 변방을 지키기 위해 갈리아 브리타니아 등 로마화한 속주(屬州)의 군사로 편성된 보조부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변방 수비를 위한 로마 방벽이 완성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28개 군단으로 구성된 로마군은 1개 군단이 시민병 6,000명에 역시 그만한 규모의 속주병 부대로 이뤄졌다. 로마군단은 제정 완성 뒤 병역의무가 없어지면서 이민족 속주병으로 채워졌고, 이는 끝내 로마의 쇠퇴와 멸망에 주된 요인이 됐다.로마뿐 아니라 역사 속의 숱한 제국은 식민지 경략에 속주병과 용병 또는 외인부대를 이용했다. 대영제국은 인도 통치에 현지인 용병 세포이를 동원했고, 프랑스 외인부대도 식민지 알제리의 반란 진압을 위해 창설된 뒤 인도차이나와 모로코 등의 해외 영토에서 용명과 악명을 함께 떨쳤다. 제국의 이민족 보조부대는 병력 부족을 메우는 동시에, 폭동 진압과 치안 유지 등 식민지 주민과 늘 마주 부딪치는 데 따르는 적대감 축적과 인명 손실을 피하는 유용한 방편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다국적군을 끌어 들이는 이유도 국제 사회가 지지하지 않은 전쟁의 명분을 얻는 것과 함께, 옛 제국들처럼 이라크 주민을 직접 상대하는 위험을 피하려는 복안이다. 영국 및 폴란드 사단과 3개 지역으로 나눠 이라크를 평정하려던 미국은 저항 세력과의 충돌과 피해가 늘자, 미군을 주요 도시에서 철수시켜 견고한 방어 거점 몇 곳에 집결시켜 격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신 도시 지역 치안은 새로 조직한 이라크 경찰과 치안군, 그리고 우방 다국적군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계획은 그러나 국제 사회는 물론이고 미국 안에서도 비판을 키우고 있을 뿐이다. 늘 그렇듯이 전쟁의 정당성을 의심치 않는 듯 하던 미국인들 스스로 이라크 점령 통치를 제국주의적 행태로 보는 이가 다수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정도다. 전쟁 명분이 거짓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국민 다수가 이라크 전쟁을 가치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이런 변화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경략 정책과 국민의 여론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그 바탕은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인식이 미국 사회에 확산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테러와의 전쟁' 명분을 적극 지지했던 미국인들도 이제는 그 것이 초강대국의 힘과 탐욕에 겨운 강경 보수세력의 제국주의적 전쟁 놀음, '부시의 전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인들은 미국을 태생적으로 역사상 숱한 제국과 대칭적 존재로 인식한다. 건국 이념부터 낡은 유럽의 탐욕스런 식민 제국주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신천지를 여는 것이었다.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을 '자유의 제국'이라고 부른 것도 드높은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이런 자기 확신은 뒷날 중남미와 필리핀 등을 침략, 숱한 인명을 살상한 미군을 스스로 '자유와 정의, 법과 질서, 평화와 행복의 향도'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부시 대통령도 이 낡은 수사로 국민을 전쟁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베트남의 악몽 속에서 그랬듯이 오랜 자기 도취에서 깨어나고 있다. 이라크의 수렁에 발을 디딘 부시가 정의와 애국심을 공허하게 외치는 반대쪽에서 '평화가 애국'이라는 구호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우리 사회 파병론자들이 미국인들조차 외면하기 시작한 '부시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우습다. 군인들은 그렇다 치고, 전쟁이 본업이 아닌 이들까지 오로지 국익을 명분으로 파병을 외치는 것은 천박하다. 미국에 등돌리는 국제 사회를 향해 우리는 미국을 따르는 것이 국익이라 파병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강 병 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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