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나빠지면서 퇴직금 체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회사들이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금을 장부상으로만 쌓아두고 실제론 운영자금으로 사용해버려 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상사다. 이런 상황을 고려, 노동부는 내년 7월부터 퇴직연금제를 도입키로 했으나 노사 모두가 노동부 입법안에 반발하고 있어 제도화는 불투명한 상황이다.체불 급격히 늘어
베트남에 현지공장을 둔 섬유회사에 근무하다 2월 퇴사한 고모(37)씨는 최근 서울 강남지방노동사무소 민원상담실을 찾았다. 퇴사한 지 8개월이 지나도록 퇴직금 430만원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 14일까지 퇴직금을 지급하겠다는 회사측 약속을 받고 돌아가면서도 불안한 표정이다. "회사가 자금 사정이 어렵다며 퇴직금을 지금까지 미뤄왔는데 금방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7월 소프트웨어개발업체 O사를 그만둔 장모(27)씨는 1년이 넘도록 퇴직금 2,300만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동료 김모(30)씨도 퇴직금 1,100만원을 아직까지 못받았다.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경영이 어려워진 탓에 이 회사는 줄줄이 퇴직금을 체불하고 있다.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8월말 현재 퇴직금 체불액은 1,063억5,900만원에 이른다. 근로자의 미래를 보장해야 하는 퇴직금을 떼이는 사례가 잦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한해 동안 제때 지급되지 않은 퇴직금 액수가 1,055억1,800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퇴직금 체불액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강남지방노동사무소 관계자는 "불황이 계속되면서 중소영세사업장을 중심으로 제때 퇴직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며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퇴직금을 줄 돈이 없는 사업주들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1997년 퇴직보험이 도입돼 사업주가 퇴직금을 보험 또는 일시금신탁으로 금융기관에 맡겨놓을 수 있게 됐지만 아직 활용은 미미하다. 금융감독원은 6월말 현재 퇴직보험과 퇴직일시금신탁의 적립액을 16조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퇴직금제도가 적용되는 5인 이상 기업이 사내 또는 사외에 적립해야 할 퇴직적립금 약 40조원의 40%만 사외에 적립된 것. 이 같은 상황에선 회사가 경영난을 겪거나 갑자기 쓰러질 경우 근로자가 퇴직금을 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퇴직연금제 도입 차질
노동부는 회사가 퇴직금을 임의로 써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퇴직연금제 관련법안을 입법예고했으나 제도 도입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퇴직연금은 기업이 퇴직근로자에게 지급하는 퇴직금을 현재처럼 회사에 모아두는 대신 은행 보험 투신 등 금융기관에 맡겨 운용하면서 근로자에게 연금으로 지급하는 제도.
2001년부터 2년여간 노·사·정위원회 논의를 거쳐 퇴직금제도의 문제점과 퇴직연금 도입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는데도 입법화 단계에서 재계와 노동계는 퇴직연금제에 대해 흠을 잡고 나섰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더불어 기업에 이중 부담이 된다"며 "기업에 커다란 경영 압박 요인이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산업자원부도 법정 퇴직금제를 폐지하고 퇴직연금제도를 사업장별로 임의 도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노동부에 공식 제시하는 등 경제 부처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노동계는 퇴직금의 지급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민주노총은 "근로자의 퇴직금을 증시안정자금으로 투입하려는 것 아니냐"며 "금융시장 사정에 따라 근로자의 퇴직금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민주노총은 "퇴직보험을 강화, 법정퇴직금의 사외 적립을 유도해 퇴직금의 지급을 확실히 보장토록 하는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 퇴직연금 방식
내년 7월부터 현행 일시금 형태의 퇴직금을 대신하는 퇴직연금제가 도입될 전망이나 노사가 퇴직연금제 방식에 대해 이견을 보여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 가운데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는 퇴직급여의 수급이 얼마나 안정적인가와 직결된 문제로,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노동계는 퇴직연금제가 도입되더라도 근로자들의 퇴직급여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보장해야한다는 입장. 근로자가 은퇴 후 받을 금액을 약정하고 사측이 퇴직연금 계좌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방식인 확정급여형만을 도입하자고 요구해왔다. 임금인상률이나 기금운용수익률 등 연금액을 산정하는 요인들이 급변하더라도 사업주가 위험 부담을 지고 근로자는 약정된 액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재계는 확정기여형만 도입할 것을 주장해왔다. 사용자가 근로자의 퇴직금으로 지급할 액수를 미리 정하고 매달 근로자 개인의 퇴직연금 계좌에 불입하면 근로자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확정기여형에 대해 우려가 높다. 퇴직연금 기금이 주식투자에 실패할 경우 근로자는 노후 자금을 날리게 된다는 것이다.
근로자에게 어떤 방식이 유리한가는 향후 임금인상률과 기금운용수익률에 따라 달라진다. 임금인상률이 기금운용수익률보다 높으면 확정급여형이 유리하지만 기금운용수익률이 임금인상률보다 높을 경우에는 확정기여형이 유리하다. 장기근속자는 퇴직시 급여수준이 높기 때문에 급여의 일정 비율이 연금으로 지급되는 확정급여형을 선택하는 게 유리하다.
하지만 노사간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함에 따라 정부는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을 모두 도입하되 개별사업장별로 노사가 자율적으로 방식을 결정토록 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확정급여형은 경영이 안정적인 기업이나 대기업에 유리할 것으로, 확정기여형은 경영이 불안정해 도산 우려가 높은 중소기업 또는 신생기업들에 유리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최수미 연구원은 "확정급여형은 연령이 높은 층과 장기근속 직원이 많은 직장에서 선호하고 확정기여형은 젊은 연령층이거나 이직률이 높은 직장에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문향란기자
■ 퇴직연금 외국사례
우리나라는 근속 연수 1년 이상의 근로자가 퇴직시 근무 연수 1년당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퇴직금으로 지급토록 근로기준법에서 강제하고 있다.
이같은 법정 퇴직금제도를 유지하는 곳으로는 우리 이외에 대만이 있을 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퇴직연금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퇴직연금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나 법적으로 사용주에 퇴직급여 지급을 강제하고 있지는 않다. 대신 세제 혜택을 통해 퇴직연금의 가입을 유도한다. 미국은 확정기여형과 확정급여형을 모두 도입했으며, 확정급여형의 경우 연금 지급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연금급여보장공사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영국은 퇴직연금에 가입한 경우 공적연금의 소득비례연금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 퇴직연금 도입 기업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만큼 공적연금의 갹출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1985년 퇴직연금을 법제화한 스위스는 퇴직연금 가입을 강제하고 있다. 근로자 소득의 7% 이상을 갹출토록 기업의 최저 부담수준을 제시하고 노사가 공동으로 부담토록 했다. 프랑스와 스웨덴은 퇴직연금 가입을 법으로 의무화했고 확정급여형만 도입했다.
퇴직연금을 도입하는 초기에는 주로 확정급여형이 많으나 최근들어 확정기여형 도입이 확대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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