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원공동체는 일종의 협업농장이기도 했다. 의지할 곳 없어 잠시 머물기 위해 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형편이 어려워 꿈을 펼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자활을 위해 들어오는 경우였다. 젊은이들은 나와 함께 농장일을 하면서 공동체를 이끌어간 기둥이었다.나는 이들의 자활을 위해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한편 영농기술도 함께 가르쳤다. 영농기술의 전수는 과수와 축산을 주로 하는 농장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현장에서 체험하는 방식이었다. 과수로는 포도를 키웠고 축사에서는 젖소와 닭, 돼지를 길러 그 당시 여기서 일을 배워나가면 충분히 독립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공동체에서 훈련을 받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것은 농사를 지어 독립생활을 하면서도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신앙생활도 '바르게 살기'라는 훈련목표와 같은 맥락 속에 있었다. 그러나 교양교육이나 신앙생활에 앞서 나는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스스로 시험을 받기도 했다.
자유당 정권 때인 3·15부정선거 직전이었다. 지금은 부천시장이 된 큰 아들 혜영이가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하루는 혜영이의 담임선생이 농장으로 찾아왔다. 자유당이 대대적으로 꾸미고 있던 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훈련시킬 목적으로 당시 학교의 육성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나를 찾은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바른 생활을 가르쳐야 할 교사가 무슨 할 일이 없어 이런 일에 앞장서느냐"며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 그리곤 농장의 식구들을 모아 '헌법에 명시된 대로 비밀투표를 해야한다'는 교육을 시키고 모두 부정선거를 거부했다.
투표가 끝난 직후 아니나다를까 경찰에서 나왔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찍지않고 비밀투표를 한데 대한 보복이 분명해 보였지만 그들은 "조사할 것이 있다"며 다른 이유를 둘러댔다. 농장 뒤쪽을 지나는 전선줄을 누가 끊어갔다며 공동체 식구들을 상대로 기초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탈은 다른 데서 났다. 인근 산에서 잘라와 마당 한켠에 세워두었던 포도농사용 버팀목이 발각된 것이다. 벌목이 금지되던 시기라 나는 경찰서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경찰에서는 버팀목을 5,000원 어치로 보고 10배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고민에 빠져있는데 동네 이장이 찾아와 "원형, 수사비 1만원만 내면 무마를 할 수 있다니 조용히 넘어갑시다"며 나를 달랬다. 그러나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벌금을 내면 국고로 들어가지만 수사비를 찔러주면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벌금맞을 생각으로 앉아있는데 오후쯤에 경찰이 아무 말 없이 나를 석방해 주는 게 아닌가. 알고보니 이장이 도저히 안될 것 같으니까 자기 돈 1만원을 집어주고 무마를 한 것이었다.
바른 삶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한 공동체 식구들은 나를 신뢰한 것 같다. 식구들은 어려운 생활을 꿋꿋이 견뎌내며 나를 믿고 따라줬다. 정부와 장사꾼의 농간으로 비료와 사료 등 농자재가 제때 안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럴 때도 뇌물을 주고 편한 길을 가기보다 차라리 농사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식구들이 나올 정도였다.
공동체에 들어오는 젊은이들은 보통 2∼3년씩 머물면서 영농기술과 신앙생활의 훈련을 받고 나가 독립을 했다. 그들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천해 보인 '바른생활의 전도자'들이 됐다. 어떤 이들은 수련기간이 짧다며 5년 넘게 공동체생활을 했고 독립해 나간 뒤에도 정신교육이 모자란다며 재차 돌아와 3∼4년씩 더 머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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