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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77>"철 모르는" 가을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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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77>"철 모르는" 가을 벚꽃

입력
2003.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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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를 예측해 무엇을 말하고 계획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모질게 내리던 지난 여름 비, 상상을 넘어서는 위력으로 삶의 터전을 강타한 태풍 등이 준 상처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문득 기온이 뚝 떨어지고 얄밉도록 청명한 가을날이 계속됩니다. 하루 내린 빗자국에 가을이 성큼 다가서고 하는 것이 바로 요즘 날씨이지요.이 편지를 쓰는 날이면, 국립수목원을 한 번씩 천천히 걷습니다. 최소한 한 주일 정도의 변화를 마음먹고 느끼는 셈입니다. 그 시간이 참 좋습니다. 이번 산책에 보니, 한 주 사이에 물들기 시작한 잎들이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복자기나무, 당단풍나무, 담쟁이덩굴 등등. 푸른 잎 사이에 이미 붉어진 잎이 제법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산림박물관 앞 벚나무의 가지 몇 개에 벚꽃이 핀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을에 말입니다. 얼마 전 청주에 벚꽃들이 많이 피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만해도 다른 곳 얘기여서 실감이 잘나지 않았는데 바로 제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참 신기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 문예전에 당선된 글 중에 '미친 개나리'란 제목을 본 기억이 납니다. 봄이 아닌 가을에, 즉 때가 아닌데 피어난 노란 개나리꽃을 두고 붙여진 제목이었지요.

도대체 세상에 없었던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일부에선 지구 환경이 큰 어려움을 당하고 기후에 이상 변화가 생기면서 나타난 일이라며 풍선처럼 부풀려 얘기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때 아닌 개나리들의 개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타난 현상입니다. 좀 냉정히 생각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때 아닌 개화와 이상기온이 관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때 아니게 개화하는 꽃이 많다면 날씨가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일 수는 있지요. 이유를 알고 보니 제가 오늘 본 가을의 벚꽃은, 말하자면 착각의 산물입니다. 여름에서 가을이 서서히 이어지지 않고 줄곧 덥다가 갑자기 추워지니까 봄에 맞는 찬 기온인 것으로 착각해 꽃을 피워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특성을 연구해 '춘화처리'라고 부르는 저온처리를 통해 연중 꽃이 피도록 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겨울이 춥지, 아무려면 봄이 더 춥겠습니까. 봄 꽃이 추운 겨울에 가만있다가 덜 추운 봄에 찬 자극을 받아 개화를 한다니 말입니다. 그 이유는 겨울에는 휴면상태이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 왜 같은 벚나무인데도 모두 때 아닌 꽃이 피는 것이 아니고, 같은 나무라도 가지마다 다른 이유 말입니다. 사람마다 더위 타는 사람, 추위 타는 사람이 있듯이 같은 나무라도 유난히 민감한 나무가 있지요. 때를 착각하고 피는 꽃은 매우 위험합니다. 겨울을 준비해야 할 이 마당에 연하디 연한 꽃잎을 펼쳐냈으니 말입니다. 찾아줄 곤충도 줄고, 꽃의 본래 목적인 결실로 이어질 확률도 적어지지요. 너무 어려운 세상, 너무 적당히 둔감해야 심신이 편한 것은 나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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