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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견우왕자와 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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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견우왕자와 북한산

입력
2003.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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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부'를 꺼려 하는 건 왜일까. 갑자기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왜 필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돈을 너무 믿고 사랑해서 사람을 그 앞에 일렬로 세우기 때문이다. 돈이 너무 많아 여백이 없어진 사람들, 돈을 너무 믿어 마침내 욕망 그 자체가 된 사람들을 징그럽도록 공허하게 느껴본 일이 없는가.갑자기 나는 우리나라 자체가 '졸부'인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으로 민망해지고 불안해졌다. 자신보다 더 큰 부자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배하고, 없이 사는 사람들은 덮어놓고 무시하는 그 불쾌하고 황폐한 사람들이 우리인 것은 아닌지 하는 참담함….

사람의 도를 팔아서라도 돈만 되면 되는 건지, 부자 나라 미국의 압력에 이 땅의 아들들을 적의를 품을 필요가 전혀 없는 전쟁터로 내몰려는 사람들, 돈만 되면 자연이고 생태계고 아랑곳없이 파헤치고 뚫고 절단 내는 사람들이 우리의 리더일 때는 절망적이다.

전통적인 양반도시 안동에선 지금 국제탈춤 페스티발이 열리고 있다. 그런데 부제가 재미있게도 '백정의 힘'이다. 나는 이현세의 화제의 작품 '천국의 신화'에 나오는 백정 길마를 생각한다. 그에게 소는 하늘궁전의 견우왕자다. 어쩔 수 없이 소를 잡아야 할 때, 그는 오랫동안 소의 눈을 들여다보며 겸손하게 소의 마음이 되어 간곡하게 기원한다.

"축생의 껍질에 무슨 미련이 있으십니까? 견우 왕자님, 하늘 궁전에 올라가시면, 하늘님께 불쌍한 중생의 소원을 아뢰어 주십시오. 어서 전생의 업을 다하고, 하늘 백성으로 태어나길 원합니다."

백정으로서의 그의 동작은 영혼이 없는 소를 잡는 피 튀기는 노름이 아니라 하늘왕자 견우를 하늘로 돌려드리는 제사다. 당연히 그의 칼은 정확하고 예리하고 섬세해서 소의 고통은 최소한이다. 마지막으로 소의 가죽을 벗기는 일은 처연하고도 담담하다. "왕자님 옷을 벗겨 드려야지, 훨훨 날아 하늘로 올라가시게…"

한 마리의 소를 잡을 때에도 소가 되어 신성하게 기도를 드렸던 그는 백정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도를 보는 도인이다. 그러니 그는 천하지 않다. 고귀한 건 태생이 아니라 인품이었고, 매혹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인품의 향기였다.

목숨이 있는 것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목숨은 서로서로 통해 있어 결국은 제 목숨을 다루는 거라고 믿었던 그 철학은 낯설고 예외적인 남의 정신이 아니라 옛날 옛적부터 우리의 핏속을 흘러왔던 너무나도 익숙한 이 땅의 정신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우리는 그 귀한 정신을 잃어버렸을까. 도처에서 참담하게 절단 나고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상처 난 산하를 너무나 자주 마주할 때마다 돈돈돈, 졸부 되느라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정신이 저 멀리에서 울고 있는 듯 했다.

12시가 되면 끝나는 지구환경 위기시계는 지금 9시 15분, 사상 최악이란다. 지금처럼 먹고 버리고, 뚫고 토막내고, 끊고 파괴하면 12시는 멀지 않다. 더구나 우리의 수도 서울의 나쁜 공기는 전세계적인데….

수도권 시민들의 허파 노릇을 하고 있는 북한산에 왕복 8차선이나 되는 도로를 뚫는다는 그 숨이 막히는 발상을 이 정부가 지울 수 있을까. 북한산은 국립공원이다. 왜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던 것일까. 원초적 존재인 거대한 산을, 그 산에 기대 사는 자연생태계를 잘 보전해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겠다는 뜻이 아닐까. 경제는 어렵다가도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뚫어놓은 터널로 교란되는 생태계는 그렇지 않다.

한 생명이 사는 건 만 생명의 은혜니 우주는 하나다. 개발은 손톱 발톱 다듬어주는 것이어야지 폐를 뚫고 장을 막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산을 지키고 물을 지키고 생명들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이 주 향 수원대 인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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