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지음·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행·8,000원'출생 이전의 한 삶이 있다. 출생으로 인해 추정이 가능한 삶. 이 세상 이전의 한 세상이 있다. 이 세상에 불쑥 나타나는 세상. 말 못하는 존재 이전의 태아가 있다. 어린이 이전의 말 못하는 존재가 있다.'
2002년 공쿠르상 수상작 '떠도는 그림자들'의 제목을 살짝 바꿔 '떠도는 언어들'로 써 보면 어떨까. 파스칼 키냐르(55)의 소설에서 문장은 부유한다. 일관된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의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소설'로 규정할 수 있는지도 모호하다.
지난해 공쿠르상 발표를 앞두고 보수적 심사위원들이 이 서사 없는 소설을 선택할지에 관심이 쏠렸으며, 에드몽드 샤를 루 아카데미 공쿠르 회장은 "1,000편의 소설에 해당하는 한 권의 천연금괴와 같은 책"이라는 찬사로 관심에 답했다.
'떠도는 그림자들'은 키냐르가 '마지막 왕국'이라고 제목을 붙인 연작의 첫 권이다. 그가 지금까지 펴낸 작품은 이 연작에 속한 것이며, 키냐르는 "죽는 날까지 '마지막 왕국'을 집필하겠다. 내가 충분히 오래 산다면 '마지막 왕국'은 모두 열다섯 권 내지 열여섯 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작의 처음인 '떠도는 그림자들'은 첫 부분을 '시작'에 대한 어구를 두는 것으로 출발한다. '수탉의 울음소리, 새벽, 개 짖는 소리, 밝아오는 아침, 잠이 깨어 일어나는 사람, 자연, 꿈, 명료한 의식.' 곧바로, 독서에 깊이 빠져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도 잊었던 보모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책을 읽는 동안 여자는 다른 왕국에 있었다. 아이는 자라서 작가가 돼서도 여자의 왕국 밖으로 버려졌던 기억에 종종 숨이 막힌다. 한편으로 그가 말도 못하던 그때에 배운 것은 책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었다. '책들이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다른 독자들에게 행사하는 인력(引力)보다 더욱 신비하고 절대적인 것이며, 내 평생 그럴 것이다.'
소설은 사유의 문장으로 엮은 것이다. 어느 곳이든 펼치면 언어가 떠돌아다닌다. 철학과 문학과 음악, 신화와 역사에 관한 아름다운 아포리즘으로 수놓은 한 권의 책이다.
그 단상은 모두 '처음'에 관한 것이다.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을 하늘의 별이 밝혀주던 고대의 시대에 대한 기억, 아직 말하지 못하던 또 말하기 이전 유아의 시기에 대한 기억. 그리고 작가로서 글쓰기에 관한 자의식이 점점이 박혀 있다. '글쓰기는 자연 언어의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대화와 무관해진 언어이다', '글쓰기는 전적으로 정치적이다. 글을 쓰는 자는 언어를 되찾고 대화를 끊고 동족과 조국을 구하고 모든 종교를 해방시키려고 애쓰는 자이다.'
왜 처음에 대해 쓰는가. 작가에게 언어를 입에서 터뜨리기 전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음(音)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소리의 생산자이지만, 출생 이전에 모두 열정적 청취자였다. 그 때처럼 처음의 음을 모아 문장을 잇는다. 그럼으로써 키냐르는 글의 '처음'과 만날 수 있다는 커다란 꿈을 갖는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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