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 주공아파트 뒤쪽 습지. 주민과 공무원 40여명이 축축하게 젖은 땅에 삽으로 골을 내자 이내 물이 고이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잠자리 유충이에요. 와∼ 이렇게 긴 지렁이는 처음보네." 흐르는 물에는 나뭇잎 등에 가려있던 곤충 유충이 함께 떠내려 갔고, 파헤쳐진 흙구덩이 여기저기서 지렁이가 꿈틀거렸다. 삽질을 하던 일손들이 잠시 멈춰지고 개구리 잡고 물장구 치던 어린시절 얘기에 함께 빠져들었다.하지만 이 소동에도 한 사람만은 일손을 놓지 않았다.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을 7년 동안 이끌어 온 최승희(62·여)씨. 그는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며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최근 시 용역 결과, 이 일대에 희귀한 야생조류가 20종 가까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내년부터 본격적인 습지정비를 앞두고 이날 서울시와 구청 공무원들이 주민들의 정비활동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습지지키기, 고난의 여정 7년
회원들의 '습지사수'는 1996년 구청이 이곳에 도로신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 지역은 원래 논농사를 했던 곳에 지하수가 솟아나오면서 생겨난 자연습지. 전체 면적은 약 7,500평으로 이 중 1,500평 정도가 습지다. 사계절 이곳을 산책하며 자연과 어울렸던 최씨 등 주민들은 즉각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보존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단순한 항의나 탄원서로는 어렵다고 판단한 회원들은 서울시립대 이경재 교수 연구팀에 습지 식생조사를 의뢰해 이 지역이 8등급 숲이라는 결과를 얻어내 보존의 필요성을 적극 알렸다.
또 수시로 동물과 식물 관찰조사와 청소 활동을 벌이는 한편 일부 땅 소유자들이 습지를 없애기 위해 땅을 갈아 엎고 나무를 훼손하자 자체 감시단을 꾸려 '남의 땅'을 지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행정당국의 무관심과 개발이득을 얻으려는 일부 주민들의 반발이 큰 장벽이었다. 실무를 맡아 온 이건엽(38)씨는 "시나 구청이 개발에만 익숙했지 습지보호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없었다"며 "도로가 나면 아파트 값이 오른다는 생각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주민들과의 불화로 많은 회원들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탈퇴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99년 한 방송사의 환경다큐팀에 의해 이곳에 천연기념물 324호 솔부엉이가 서식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진 후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뒤따랐고, 드디어 2000년 2월 서울시는 한강 밤섬에 이어 이곳을 두 번째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했다. 이곳에는 황조롱이를 비롯해 서울시 보호야생동물인 오색딱따구리, 꾀꼬리, 흰눈썹황금새, 쇠딱따구리, 청딱따구리, 쇠박새 등이 서식하고 있다. 습지 주변에는 오리나무, 물박달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보존습지 넓히는 계기돼야
그러나 회원들은 "보존지역 지정은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현재 둔촌습지는 고마리와 부들, 줄풀과 같은 습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지점이 사유지로 묶여 있는 상태. 이씨는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하지만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손도 못 대는 곳이 많다"고 안타까워 했다. 조향미(45·여)씨는 "습지 주변 숲에도 물박달나무와 갈참나무 등 소중한 수목들이 자라고 있다"며 "이 일대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습지의 영구보전을 위해 50여명의 회원들은 주변정리는 물론 생태 전문가들의 강의를 꾸준히 듣고 있다. 박현주(46·여)씨는 "이웃들에게 습지 보전의 필요성을 알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습지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생태교실'도 열고 있다.
서울시립대 한봉호 교수는 "생태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둔촌 습지를 살린 것은 다름아닌 지역 주민들"이라며 "현재 시 전체 면적의 0.3%에 불과한 습지를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서울시 환경국 조용호 팀장도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행정당국도 환경 보호의 소중함을 깨닫고 뒷받침하게 된 것"이라며 "좀 더 적극적으로 도심 습지 보전에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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