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 지음 갈무리 발행·2만원현재 전 세계 지식인들의 중요한 화두는 미국 패권의 현실과 전망이다. 거세게 타오르는 이 논쟁의 광야에 불씨를 지핀 것은 이탈리아의 진보 지식인 안토니오 네그리가 마이클 하트와 같이 지은 '제국'(이학사 발행)이라는 한 권의 책이다. 21세기 최대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제국'은 미국 클린턴 정부의 뛰어난 자유주의 지식인 레온 펄스에서부터 영국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캘리니코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지식인을 논쟁의 격류에 끌어들였다.
최근 한국의 한 실천적 지식인이 세계 최초로 이 네그리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단행본을 출간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가 낡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행했다는 네그리의 도발적 명제를 저자는 이 책에서 이론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여기서 제국이란 '전 지구적 권력 네트워크를 통해 지배력을 관철하는 체제'를 말한다.
네그리는 아마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휴렛팩커드의 피오리나가 건설하려는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네트워크 사회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런 사회에서 네그리는 세계화가 가진 진보적 잠재성에 주목, 세계화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속화하자는 충격적인 주장을 내놓아 전통적인 진보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제국이 진보적 잠재성을 갖는 이유는 제국으로 이행한 밑바탕에 네그리가 '다중'이라고 이름 붙인 행동하는 사회적 힘들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국민국가의 주권 제약을 받지 않는 전지구적 시민권 같은 요구를 통해 이런 힘을 분출시켜 자본이 주도하는 현재 세계화의 성격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일부 진보 지식인들은 선진국과 제3세계의 불평등 등을 예로 들어 아직 제국의 단계가 오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저자의 변론은 제국이 하나의 미래적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네그리의 비판자들이나, 정력적인 변호인인 저자 모두 이러한 경향성이 어떻게 현존하는 다른 경향과 정치·경제적으로 결합되며, 또 현실로 나타나는지 깊이 있게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가 과거의 제국주의로 돌아가고 있다는 네그리와 저자의 진단 또한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진보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은 이론이 추상적인 경향에 머물러 있다는 점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현재 세계체제론의 거두인 아리기의 논문에 이어 데이비드 하비, 찰머스 존슨등 미국의 석학이 잇따라 신간을 내놓으며 네그리가 완성하지 못한 퍼즐에 뛰어들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들 중심부 지식인보다 조정환씨는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세계화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한국이야말로 네그리의 이론을 발전시킬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한국은 네그리의 이론을 적용할 사례로 언급될 뿐이다. 책은 그 이론을 발전시킬 실사구시적인 통찰까지 보이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네그리나 저자는 암호 소스가 공개돼 누구나 컴퓨터 운영 체계를 계발하는데 참여하는 리눅스 운동처럼 그런 지적 프로젝트에 집단 지성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풍부하게 사유하는 자만이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독자는 그들의 초대에 응할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안병진·경희대 시민사회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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