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는 '발명'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직 '발견'해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 저를 도전하게 합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것들을 찾기 위한 모험과 탐험은 제 삶의 또 다른 화두입니다."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하고, 화려한 듯 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이름난 민경식 건축연구소 민경식 소장. 자신의 주 분야인 건축은 물론, 맛과 생활에서도 새로움을 찾기 위해 영원한 모험을 꿈꾼다는 민 소장은 현실에 지쳐 안주하는 이들에게 '빨리 일어나 새로운 것을 찾아라'고 말한다.살아 움직이는 건축 디자인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 센터 '강가' '이키이키' '싱카이' '뭄바', 청담동 '파크' '호면당' '쁘띠 시즌스'…. 요즘 최고로 '잘 나간다'는 레스토랑이면서 민 소장의 작품이라는 꼬리표가 붙는곳이다.
역삼동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강원도 국제 관광엑스포, 회현동 프라임타워(구 아시아나항공 빌딩) 등 국내 작품부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비전시티21' 뉴욕 씨티은행 본사에 이르기까지 민 소장의 프로젝트 목록은 지역과 형태, 업종을 가리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
"특별히 분야를 정해놓은 것은 아닙니다. 원칙이 있다면 모든 일을 재미있고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인데 운 좋게 그런 일을 많이 맡았어요. 최근에는 레스토랑을 주로 디자인했는데 큰 건물과 달리 작은 소품이나 메뉴, 심지어 음악까지 함께 설계할 수 있어 굉장한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건축이나 인테리어 디자인에 있어 민 소장이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살아있음'과 '반응'이다. 인간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녹슬어 색상이 변하는 철, 계절마다 색다른 자태를 뽐내는 살아있는 식물 등 민소장의 작품 속에는 늘 움직임과 변화가 함께한다.
"음식에도 디자인이 필요하다"
"개성이 고향이셨던 아버지는 반드시 장을 직접 보셨습니다. 집안 살림을 빈틈없이 챙기는 개성인들의 성격 때문이지요. 아버지를 따라 먹거리를 사러 다니면서 어릴 때부터 먹는 것을 즐기게 됐어요. 지금도 맛있는 음식은 심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추위와 짐승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집이지만 지금은 미적인 관점이 더 부각된다. 마찬가지로 음식도 생존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 이제 하나의 문화로 다뤄져야 하고 따라서 디자인의 개념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 민 소장의 생각이다. 음식에 대한 민 소장의 철학은 의외로 단순하다. '맛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새로운 음식이라도 모험한다는 기분으로 오해와 편견 없이 도전하면서 맛을 들여볼 것을 권한다. 한 예로 타이에서 먹었던 '찜쭘'이라는 타이식 샤브샤브를 들었다. 미식가라고 자부하는 민 소장도 국물을 한 숟갈 뜬 후 '윽!'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향이 짙었지만 참고 몇 차례 먹은 후 지금은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음식에 대한 얘기를 김치에 대한 애정으로 마무리했다. "유럽의 와인과 파스타, 일본의 사시미와 스시처럼 우리나라의 김치도 세계로 뻗어나갈 만한 경쟁력이 있는 식품입니다. 프랑스의 '와이너리(winery·와인농장)' 같은 '김치너리'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다시 하고픈 노래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지금까지도 결혼식 축가로 사랑 받고 있는 '젊은 연인들'. 민 소장은 이 노래로 서울대 조경학과에 재학중이던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중학교 합창반에서 활동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밴드부에서 플루트를 불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끝나자마자 배운 통기타를 들고 '스위티스'라는 보컬 그룹을 결성해 소규모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끼'가 얼마나 넘쳤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부드러우면서도 친근한 목소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았다.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개인의 개성을 존재하자는 의미에서 '민경식 민병호 정연택'이라고 세 사람의 이름을 딴 그룹 이름을 지었는데 라디오에서는 편의상 '서울대 트리오'라고 부르곤 했어요. 1년쯤 지나 각자의 전공에 전념하기 위해 가수 활동을 접기로 했는데 아마 가장 아쉬워한 사람이 저였을 겁니다."
그 후로 삶이 너무 바빠 노래에 대한 꿈은 마음 한구석에 접어 두었지만 "언젠가 다시 찾겠다"며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18번'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 뉴욕에서 활동할 때 친구 집에서 이 노래를 부른 후 '프랭크 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며 웃는다.
"산은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
민 소장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 중에서도 1996년 찾았던 네팔은 그의 삶에 '산'이라는 또 하나의 도전거리를 더해주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가는데 그 아름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꽃이 만발한 '포크하라'에서는 오전 7시30분부터 딱 한시간만 구름이 걷히며 히말라야 산의 정상이 보이죠. 당시 아찔한 기분이 들면서 '꼭 저 산에 오르겠다'고 결심했죠." 서울로 돌아온 그는 매주 산을 오르며 히말라야 등정을 준비했고 함께 오를 사람들을 모았다. 매주 1회 북한산 청계산 등 서울에 있는 산을 오르고 한 달에 한번은 지리산 설악산 같이 서울에서 떨어진 높은 산으로 원정을 간다. 오랜 준비 끝에 내년 3∼4월쯤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하다는 '안나 푸르나'에 오를 예정이라며 흥분된 표정이다.
"40대가 되면 삶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쉽죠. 산은 중간에 내려올 수 없기 때문에 저에게 끊임없이 도전과 모험을 강요합니다. '꼭 올라가야 한다'는 절대성과 역동성이 산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배우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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