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잠기고 그나마 남은 것은 쭉정이 인데 추곡수매 할 게 뭐 있겠어…."한 해 농사를 결산하는 추곡수매가 1일부터 일제히 시작됐지만 태풍에 황금들판을 송두리째 빼앗긴 수해지역 농민들은 시름만 깊어지고 있다.
2일 태풍 매미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신안농협미곡처리장은 농민들의 발길이 뚝 끊긴 채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한 잔의 막걸리에 한여름 고생담을 안주 삼아 걸쭉한 입담을 토해내던 시끌벅적한 예년의 풍성했던 수매현장 분위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생비량면 도전리 이시택(43)씨는 "수확량이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친 40㎏짜리 벼 30부대에 그쳤을 뿐 아니라 질도 떨어져 특등과 1등은 아예 없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수매현장을 둘러보러 왔다는 신안면 소이마을 문명환(52)씨는 "지난 4월 70부대의 추곡수매 약정을 체결하고 250여만원의 선급금까지 받았는데 논(1,200평)이 거의 물에 잠기는 바람에 약정 물량을 못 채워 위약금(15∼18%의 연체이자)까지 물어야 할 처지"라며 혀를 찼다. 농협 검사원 공기주(36)씨는 "마음 같아서야 모두 특등을 주고 싶지만 예년에 비해 등급이 많이 떨어져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곤혹스럽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산청에서의 첫날 수매는 12농가에 164부대가 고작이었다. 등급도 한 부대에 6만2,440원을 받는 특등은 아예 없고 1등도 53%인 87가마에 그쳐 예년의 80∼90%에 비해 크게 줄었다.
강원도 수해 농민들도 추곡수매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남의 얘기처럼 흘려버리며 허탈해 했다.
태풍으로 침수됐던 논에서 벼이삭을 하나씩 잘라내던 강원 강릉시 교동 박영상(50)씨는 "논 주인에게 도지(賭地·임대료)로 주기로 한 쌀 6가마를 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논 2,000여평을 빌려 농사를 짓는 박씨는 아침부터 일흔이 넘은 어머니와 함께 대부분이 모래에 묻힌 벼이삭을 낫으로 하나 하나 잘라내고 있었다. 박씨의 노모는 "이렇게 벼이삭을 주워봐야 모두 부스러기 쌀인 싸라기 일텐데 맥빠져 일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수해 농민들은 물론 타 지역 농민들도 태풍피해 등을 감안하면 올해 수매가격이 10%가량은 인상됐어야 한다면서 가격동결에 분통을 터뜨렸다. 철원농민회 회원은 "생산량이 줄어든 상황에서 가격마저 오르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며 "정부는 WTO체제속에서 비교역적인 분야에 소득보전을 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릉=곽영승기자 yskwak@hk.co.kr
산청=이동렬기자 d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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