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만에 조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하는 우리 말 강연입니다."엊그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학술단체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송두율 교수의 강연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말한 37년은 우리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상상해야 하는 일제 36년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 말로 강연하게 된 것을 감개무량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나라가 망해 조국을 떠났다가 광복된 조국에 다시 돌아온 사람의 시간감각을 우리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듯이, 항상 자신의 말로 말하는 사람들은 늘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사람의 가슴 깊이 쌓이는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에게 조국은 추방된 것이나 진배없는 사람의 고통의 시간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모국어로의 귀환을 의미했음에 틀림없다.
송 교수는 원래 계획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연 성공적이었는가'라는 기조 발제 대신, '통일의 철학'이라는 마무리 강연을 하였다. 토론의 최종 마무리는 민주화된 사회라는 이미지와는 어딘지 잘 들어맞지 않는, 그래서 약간 어색한 느낌을 주는 만세삼창으로 끝났다. 그것은 "대한민국 만세, 민족통일 만세, 민주주의 만세"였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한국민주화운동의 쟁점과 전망'을 주제로 내건 이번 심포지엄은 발표된 논문 내용보다는 송 교수의 발표여부 문제로 야기된 형식과 절차의 혼란 속에서 시민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그리고 헝클어진 질서를 다시 잡아가는 열정과 지혜의 과정을 통해 주제의 의미를 십분 깨닫게 하는 의외의 성과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송 교수 문제는 분단체제와 민주화운동의 관계에서 이념적·법적 문제 이외에 양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노동당 입당사실이 밝혀지고 정치국 후보위원 의혹마저 사실로 드러나면서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시민들이 그의 법적 처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동안 변화한 남북간 힘의 차이에 대한 인식, 또는 남북화해의 과정과 방법에 대한 고민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최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견딜 역량에 대한 자신감 또한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지 않는 정치적 주장은 단지 낡은 이데올로기 공세로 간주되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송 교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조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내세워 그를 옹호할 수만도 없다. 오히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말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노동당 입당사실이나 정치국 후보위원 여부가 아니라 왜 그런 사실을 미리 고백하지 않았는가에 있다. 오랜 격리에서 오는 무뎌진 현실감각 때문이었을까, 그는 한국의 실정법을 잘 몰랐다는 말을 하였지만, 당국은 그의 해명서에도 불구하고 보다 공개적인 방식으로 국민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게오르그의 25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색한 고향의 세계에서 양심을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고통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양심의 문제는 송 교수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의 통일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화해의 문제를 풀어갈 핵심요소이다. 남북의 시민들이 얽히고 설킨 오해와 불신, 원한을 풀어가려면, 법과 제도가 아니라 관용과 양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심화될수록 양심의 문제가 중요해지며 동시에 관용의 수준이 높아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상생의 정신 하에 양심원리가 권력원리나 이익원리에 우선하는 사회이다.
송 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통일은 '미래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그 또한 양심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양심의 세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구한다.
정 근 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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