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중소업계에 어음이 다시 성행하고 있다. 그나마 어음기일도 갈수록 길어져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날로 악화하는 추세다. 중소기업들은 향후 전반적 경기사정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만 재정형편만큼은 더 나빠질 것으로 보고 있어 올해 말∼내년 초 중소업계에 심각한 '자금 보릿고개'가 우려되고 있다.현금 대신 어음
1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전국 1,500개 중소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3분기 판매대금결제상황' 조사에 따르면 3분기 중 판매대금을 현금으로 받은 중소기업은 평균 56.5%(어음결제기업 43.5%)로 집계됐다. 현금결제 기업비중은 지난해 3분기 59.1%에 달했으나 4분기 연속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대기업과 납품관계가 있는 중소기업은 현금결제 비중이 평균치를 밑도는 50.7%에 불과, 현금지급에 앞장서야 할 대기업이 하청·납품업체에게 오히려 어음을 남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어음판매 회수기일도 갈수록 길어져 중소기업들이 납품후 최종적으로 돈을 손에 쥐려면 무려 4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 납품후 판매 대금으로 어음을 받기까지 44일(수취기일), 이 어음을 기한 후 현금화하기까지 88.4일 등 총 132.4일이 걸리는 것이다. 어음회수기일은 지난해 1분기 120.1일 수준이었으나 1년반만에 12일이상 늘어났다. 현금으로 결제받는 경우도 납품 즉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균 36.6일이 지나야 손에 들어온다.
규모가 작은 '힘없는 기업'일수록 어음회수기간은 길어진다. 종업원 50∼299명 규모의 중기업은 121.5일 정도지만, 5∼49명 규모의 소기업은 납품후 현금을 만지려면 중기업보다 보름이상 긴 137.7일을 참아야 한다.
기협중앙회 관계자는 "내수침체가 지속되고 금융권이 중소기업 대출비중을 축소하면서 한때 반짝했던 현금결제관행이 흔들리고 있다"며 "지금대로라면 중소기업들은 다시 과거처럼 어음 압박에 짓눌리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경기 풀려도 자금난은 계속
수출부문의 상대적 개선으로 4분기 경기는 다소 나아질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기업은행이 2,064개 중소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기업 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4분기 BSI는 108을 기록해 올들어 처음으로 100을 넘어섰다. BSI가 100을 넘으면 경기호전기대심리가 그만큼 높다는 뜻. 내수에 대한 BSI가 109로 집계된 것을 비롯해 수출 104, 신용장내도액 107, 고용 104 등 전반적 경기동향에 대해 중소기업들은 대체로 낙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독 자금사정만큼은 비관적 시각이 팽배하고 있다. 판매대금을 현금으로 결제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BSI는 92, 어음이나 외상채권을 현금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BSI도 89로 모두 100을 밑돌았다.
물건을 팔아도 현금 대신 어음을 받을 것이란 우려, 어음을 받더라도 제때 현금으로 융통하기 어려울 것이란 걱정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통상 자금사정은 경기에 후행하는 특징이 있다. 경기가 개선돼 물건이 잘 팔려도 대금이 들어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정부는 수출 호전 및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에 따른 부양효과로 내년부터 경제여건이 다소 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경기파급 경로상 가장 마지막 단계에 놓여 있는 중소기업은 연말은 물론 내년 상반기까지도 상당한 자금압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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