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원공동체에는 대개 20명 가량의 식구들이 함께 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생겼다. 서로 다투는 것은 다반사고 싸움이나 사고로 심하게 다치는가 하면 소소한 물건을 도난 당하기도 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당시 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것처럼 공동체생활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들인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들이는 순간부터 조심해야 했다. 그래도 터지는 사고는 어쩔 수 없었다.하루는 공동체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청년이 숫돌에 낫을 갈다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옆에서 누군가 장난을 친다며 물을 끼얹는 바람에 이 청년이 갈던 낫에 손을 크게 벤 것이다. 피범벅이 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간단하게 응급처치만 하고 나도 '금방 낫겠지' 하고는 잊어버렸다. 당시는 그 정도로 병원을 간다는 게 도리어 이상할 때였다. 그런데 청년의 상처는 낫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기만 했다. 상처가 덧나 파상풍으로 번진 것인데 알고 보니 수술비가 25만원이나 든다고 했다. 지금으로 치면 250만원이 넘는 큰 액수로 당시에도 젖소 한 마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청년은 한푼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고민에 빠졌다. 청년의 고통을 생각하면 바로 병원으로 가야 했지만 적잖은 수술비 앞에서 망설여진 것이다. 그때 문득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둘째 아이가 떠오르며 '만약 내 아이였다면 젖소 한 마리 값이 아깝다고 이렇게 망설였을까'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길로 청년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고 수술을 통해 청년의 생명을 구해냈다. 치료비는 어쩔 수 없이 젖소를 팔아 마련했다. 시험에 빠진 내가 한순간 잘못 판단했다면 끔찍한 결과가 생길 판이었다. 모두가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다. 공동체생활에서는 의외의 소득도 따랐다.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다 개인주의의 위력을 알게 된 것도 그런 소득의 하나였다.
신앙생활의 지도자였던 김태희씨에게 딸(아이 이름을 따서 재명이네로 불렀다)이 하나 있었는데 이혼을 당하는 바람에 갈 곳마저 잃고 두 자식과 함께 공동체로 들어오게 됐다. 재명이네는 양계장을 맡았는데 양계장에서 나오는 수익을 따로 챙기도록 했다. 하루빨리 독립해 나가라는 배려였다. 그랬더니 재명이네는 죽기로 일해 병아리 1,000마리를 대부분 온전한 닭으로 키워냈다. 당시만 해도 병아리가 양계장에 들어오면 10%는 죽어나가는 게 정상이었는데 재명이네는 병아리를 보듬다시피 하며 정성을 들인 결과였다. 내가 두 눈으로 확인했던 것은 몇 십년이 지난 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놀랄만한 생산성을 기록했다는 개인주의의 위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풀무원 공동체에서 사유재산은 아주 예외로만 인정됐고 모든 것이 공동체 소유로 내것 네것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먹거리 하나를 두고도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자기 자식한테 고기 한점 더 먹이겠다는 싸움 끝에 보따리를 싸 들고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만큼 공동체 생활이 넉넉지 못했던 탓이다.
그런 공동체 생활을 겪어낸 7남매가 모이면 "우리 식구끼리만 모여 사는 생활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며 그 때를 회상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딸들은 옷을 갈아입을 곳이 마땅치 않아 고생했다는 푸념도 늘어 놓았다. 생각하면 한쪽 가슴이 뜨끔하기도 하지만 공동체 생활이 교육에 나쁜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 많은 형과 오빠들, 삼촌들과 함께 뒹굴며 생활하면서 나눔의 미덕을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꽁보리밥이건 쌀밥이건 함께 나누는 나눔의 삶이 기아(飢餓)문제의 해법이라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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