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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2>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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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2>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

입력
200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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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향기는 책을 보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만난다. 후각이 아니라 시각으로 느끼는 향기다. 산기(山氣) 이겸노(李謙魯)옹은 아흔 다섯이 되는 지금까지 그 향기를 벗삼아 살고 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생전에 선운사 침향(沈香)을 으뜸으로 쳤다. 참나무를 장수강 바닥에 가라앉혀 두었다가 몇 백년 뒤 꺼내 햇볕에 잘 말려 피우는 향이다. 미당이 침향을 사르며 옛 사람들의 깊은 마음을 느꼈듯이 이옹은 고서를 통해 선인들의 고결한 정신을 읽는다.인사동 통문관(通文館)은 이옹의 분신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금항당의 옥호로 출범한 통문관은 내년이면 고희를 맞는다. 통문관은 이제 손자(동호·34)가 꾸려가고 있다. 대신 이옹은 평일 오전 11시면 통문관 2층 상암산방(裳巖山房)으로 출근한다. 거기서 사람도 만나고 책에 대한 정보도 주고 받는다.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은 책의 도움도 큽니다. 책을 매개로 많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으니 이 보다 건강에 좋은 일은 없어요." 장수비결의 하나로 책을 들만큼 이옹은 책을 삶의 동반자로 생각한다. 선인들의 정신이 책 갈피마다 숨쉬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역대 시조를 집대성한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詠言)'과 농촌의 생활풍속을 정리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등 고서 5종의 행방을 몰라 마음이 아픕니다. 언젠가 보물지정 심사를 받기 위해 집에서 갖고 나왔는데 그만 잃어버렸어요." 기억력의 감퇴로 보관장소를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자위도 해보지만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이옹이 87년 출간한 '통문관 책방비화'는 고서의 역사책이나 다름없다. 광복이후 국보내지 보물급 고서의 비화가 가득하다. 이옹의 책 사랑 마음이 그대로 스며 있는 책이다. 수많은 고서들이 이옹을 만남으로써 멸실의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빛을 찾았다.

이옹은 광복직후 47년 창덕궁 장서각에 보관돼 있던 무주 적상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 도난사건을 조기 발견,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때 1권은 전주의 제지소로 팔려가 재생용지가 되었다. 52년 일본에서 나온 '조선왕조실록'의 영인본의 판매를 의뢰받은 이옹은 3년 뒤 우리 손으로 영인본을 간행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진 국보 '월인석보'를 61년 10월 찾아내 연세대 도서관이 소장하도록 주선했다. 서울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국사기' 역시 그의 손을 거쳐 사라질 비운에서 벗어났다.

통문관은 인사동을 상징하는 키워드의 하나다. 문우서림 대표 김영복(49)씨는 "80년대 초까지 만해도 통문관은 한국학연구의 사랑방이자 통로 였습니다. 국문학, 역사, 고미술사 등 한국학분야의 원로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통문관을 사랑방처럼 드나들었습니다. 통문관은 그만큼 귀중한 전적이 많았을 뿐 아니라 경제적 사정이 넉넉치 않은 학회들의 사무실 역할도 했거든요. 심지어 한국어문교육연구회는 통문관 3층에서 태동했습니다." 김씨도 20년 가까이 이겸노옹 곁에서 고서를 보는 안목을 키웠다. 고서점 운영에는 서지학자 못 지 않은 지식과 안목이 필요하다.

이옹의 고서수집은 민족문화의 보전 차원에서 비롯됐다. 그는 일제강점기 귀중한 고서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마구 유출되는 사례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았다. 또 무지한 사람들이 폐지로 팔거나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경험했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감정하고 구입했다.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적합한 구매자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고서는 1만종이 넘을 겁니다. 목록을 정리하는 작업을 틈틈이 하고 있어요."

1909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에서 태어난 이옹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통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 일본 관헌의 방해로 유학의 꿈을 포기한 그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문제였다. 어느날 고향친구 이태식을 우연히 만나 인사동의 서점 선문옥 점원으로 취직을 한다. 선문옥과의 인연은 결국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광복을 맞은 이옹은 수도약국 자리의 금항당을 현 위치로 옮기고 이름도 통문관으로 바꾸었다. 고서를 수집 보존하기 위한 사명감이 작용한 것이다. 출판업의 겸업도 시작했다. 현재의 통문관(대지 19평 연건평 70평)은 67년 신축한 건물이다.

통문관은 46년 출판업의 첫 결실로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을 출간했다. 출판업은 결코 돈벌이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월인천강지곡' '훈민정음'을 비롯, 수많은 고서의 영인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학 연구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한국미술문화사논총' 등 고유섭의 저서도 통문관에서 나왔다.

이옹은 단순한 고서점 주인이 아니다. 고서를 찾아내 그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꼭 필요한 학자들에게 제공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주위에는 당대의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독서인구의 저변확대를 겨냥해 78년에는 '청구서화가명·자·호보(靑 丘書畵家名·字·號譜)를 염낭본으로 간행했다. 책의 크기는 10x13cm로 역대 예술인들의 자와 호, 이름을 수록하고 있다. 염낭본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꺼내 볼 수 있게 만든 소형책인데 이 때 처음 사용한 용어다.

'적서승금(積書勝金)', 통문관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물질의 풍요보다 정신의 가치를 우선하는 삶을 이르는 말이다. 이옹은 적서승금을 삶의 좌표로 살아왔다. "이제는 적금승서의 시대야." 변해가는 세태가 못내 안타까운듯 이옹은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이기창 편집위원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最古 활자본 상정예문 틀림없이 實在"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상정예문(詳定禮文)'은 실재할까. 이겸노옹은 여전히 상정예문의 존재를 믿는다.

지금까지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 최초의 책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이 책은 고려 말 우왕 3년(1377년)에 출간됐다. 그런데 상정예문은 직지심체요절 보다 130여년 앞선 고종 재위기간(1232∼1241)에 금속활자로 간행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국이상국집(東國 李相國集)'의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는 1232년 강화로 천도한 뒤 이규보가 갖고 있던 상정예문을 저본 삼아 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정예문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세계인쇄사를 다시 써야 하는 대발견이 된다. 그야말로 국보중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인 것이다.

이옹의 기억으로는 1970년대 초이다. 한 청년이 통문관으로 찾아와 고서목록을 내놓았다. 목록을 훑어보다 '상정예문 2책'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멈췄다. 한순간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사실여부 확인을 위해 값을 물어보았다. 청년은 쌀 50가마 값을 요구했다.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8,000원 이었으니 40만원이었다. 값을 따질 수 없는 문화재인데 고작 40만원이라니,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청년과 약속을 단단히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대신 다른 사람 7,8명이 같은 목록을 갖고 번갈아 나타났다. 이 옹과 거래를 하던 중간상인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상정예문의 실물은 끝내 볼 수가 없었다. 몇 년 뒤 상정예문은 안동에서 고서를 취급하는 모씨의 손을 거쳐 대구의 한 장서가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만 나돌았다. 이옹은 당시의 소동을 날조로 보지 않고 있다. 섣불리 공개했다가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한 소장자가 극비에 붙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옹은 언젠가는 상정예문이 자신 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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