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살 돈이 없어 논문을 쓰지 못했던 가난한 50대 남성이 병든 80대 어머니에게 석사논문을 '마지막 선물'로 드리려고 논문자료로 쓸 서적을 훔친 혐의로 법정에 섰으나 재판부의 선처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서울지법 형사12단독 천대엽 판사는 3월 교보문고, 영풍문고, 서울문고에서 '막스쉘러 철학의 이해' '윤리학과 메타윤리학' 등 신학석사 논문 작성에 필요한 서적 34권(38만2,260원 상당)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노모(50)씨에게 29일 벌금 5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했다. 선고유예는 판결 후 2년이 지나면 선고 자체를 면제해 주는 것으로 사실상 무죄나 다름없다.
노씨의 가족은 파킨슨씨병을 앓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자주 혼수상태에 빠지는 어머니(83), 나병을 앓고 있는 형(58·무직),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초등학교 4학년생 조카(10) 뿐이다. 척추장애인 이었지만 파출부 일로 생계에 도움을 줬던 누나가 세상을 떠나고, 노씨도 폐결핵을 앓아 노씨 가족의 유일한 생활비는 매달 지급되는 정부 보조금 40만원이 전부다.
천주교 빈민구제단체 등에서 빈민운동을 벌이기도 한 노씨는 서강대 신학대학원을 수료한 뒤 막노동을 하며 삶의 꿈을 키웠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참고문헌을 구할 돈이 없자 절망했다. 결국 서점에서 책을 훔쳤고, 벌금 100만원에 약식 기소됐으나 돈이 없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노씨는 법정에서 "적막과 고독이 죽음같이 무서워 책이라도 보려 했다"며 "병자들뿐인 집안에 신문도, 컴퓨터도 없이 멍하게 벽만 쳐다보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학위라도 받으면 비참함 뿐인 어머니께 마지막 효도가 될까 싶었다"고 말했다. 재판부도 "노씨가 이득을 얻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기 보다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컸던 것 같다"며 선고유예 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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