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아시아 유학생들의 신천지다. 호주 교육부가 발간한 '해외 유학생 현황'에 따르면 2000년 기준 18만 8,277명의 유학생 중 아시아 출신이 15만 5,577명으로 전체의 82.7%를 차지하고 있다.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한국 등 상위 10개국을 아시아 국가가 모두 점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유학생 증가율도 중국과 한국 등이 가장 높은 추세다. 미국, 영국에 이어 '제3의 유학대국'을 자처하는 호주 정부로서는 1년 동안 유학생들이 사용하는 36억 9,600만 호주달러(약 2조 8,658억원) 대부분을 지출하는 아시아 유학생들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입시학원만 500여개
그러나 이 같은 아시아 출신 유학생의 집중 현상은 역으로 호주 정부에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아시아 유학생의 대량 유입으로 아시아 입시 교육의 폐해가 호주 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 영어실력이 부족한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따라잡기 위해 유행처럼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는 경우가 늘어났다. 현지 유학원 관계자는 "한국 유학생의 경우 영어실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지학교에 다니면서 과외를 받는 경우가 필수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면서 "한국인이나 호주 선생님으로부터 시간당 25∼50호주달러를 지불하고, 영어는 물론 수학까지 일주일에 과목 당 2시간씩 공부를 한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중국, 한국, 일본 학생들의 명문고교 진학 비율이 증가하면서 위기 의식을 느낀 호주 학생까지 학원이나 과외 교육에 의존한다. 이로 인해 10년 전만 해도 5∼10개에 불과하던 입시학원은 최근 4∼5년 사이에 500∼600개로 난립했다. '입시교육의 원조'인 한국인들이 시드니 시내에서 직접 운영하는 J, N 학원 등은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한국의 종로학원이나 대성학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유형의 학원들은 시드니 뿐만 아니라 멜버른, 브리스번 등 호주 주요도시 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의 오클랜드까지 체인망을 갖출 정도로 급성장했다. 한국식 학원의 인기가 치솟자 호주 사람들도 시드니 시내에 킵 맥그래이스(KipmcGrath), 더 넘버 워크스(The Number Works), 마스터 코칭 (Master Coaching) 등과 같은 학원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시험문제 도난 사고로 언론에 뭇매
학원 수강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입시 준비생까지 다양하다. 특히 전국적으로 20여개에 달하는 명문고교(Selective School) 진학을 위한 중학생이 대다수다. 따라서 학원 강좌 내용도 명문고교 진학을 위한 입시시험인 HSC(Higher School Certificate)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도록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일부 학원에서는 1996년과 2001년 두 차례나 명문고 시험 문제를 훔쳐서 학원에서 미리 강의하는 등 성적위주의 강의로 일관하다 현지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현지 유학생인 L(28)씨는 "일부 한국 학원들의 과잉 경쟁이 한국식 입시교육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면서 "한국 유학생이 대학 진학 후 가장 학업을 게을리한다는 통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수강생 중 초등학생은 대체로 일주일에 한번씩 학원에서 영어, 수학, 영재교육 등을 듣고, 고등학생은 영어, 수학, 과학수업을 수강한다. 수강료도 주당 45 호주달러 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대체로 저렴한 편이다. 수강생들은 주로 중국인이 50% 이상을 차지하는 등 아시아 유학생의 수강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한국인은 30% 정도다. 시드니 북부 서리 힐(Surry Hill)처럼 호주인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곳도 있다.
한국식 8학군과 명문고스카우트 경쟁
학원이나 과외 등을 많이 받는 아시아 학생들의 입시성적이 좋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평범한 고교가 명문고교로 격상되는 경우도 있다. 시드니 시내에서 한국 조기유학생이 많이 다니는 스트라스필드 고교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호주 뿐만 아니라 뉴질랜드도 비슷한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오클랜드 시내에는 명문고교를 다닐 수 있는 학군에 부유층이 몰려 들어 '한국식 8학군'이 형성되기도 했고, 장학금을 미끼로 성적 우수학생을 스카우트하는 등 전통 영국식 교육형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열경쟁 양상이 등장했다. 오클랜드 한인회 관계자는 "한국을 따라 중국인들도 명문학군으로 연쇄 이동, 현지사회의 골치거리"라고 말했다.
아시아 학생 규제 움직임도
호주나 뉴질랜드 교육부에서는 이상 교육열에 당혹스러워 하면서 교육열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성하창(57) 시드니 교육원장은 "시드니고교(Sydney Boy's High School)출신의 사회저명인사가 '아시아 학생들이 공부에만 집중하고, 운동클럽에 가입을 안해 100년 전통의 럭비클럽이 해체위기에 놓였다'고 불평했다"면서 "그 뒤 곧바로 뉴사우스웨일스주 교육장관이 '학생선발제도에서 영어비중을 높이겠다'고 주장한 것은 입학시험을 현지인이게 유리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전했다.
/시드니(호주)·오클랜드(뉴질랜드)=정원수기자 nobleliar@hk.co.kr
● 학원 체인 운영 제임스 안
호주와 뉴질랜드에 40여개 분점을 가진 제임스 안 코칭 칼리지(James An Coaching College)의 제임스 안(43·사진) 대표는 호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고교 시절인 1976년 부모님을 따라 가족 초청 형식으로 시드니에 첫 발을 내디딘 제임스 안은 대학 졸업 직후부터 학원사업에 뛰어들었다. 현재는 학원 경영으로 매년 1만명 이상의 수강생을 확보한데다 1,500만 호주달러를 벌어들이는 제임스 안. 그의 독특한 강의는 86년 시드니 시내 캠시의 자택에서 한국인 학생 1명을 상대로 과외를 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제임스 안은 "처음 이민을 왔을 때 영어실력뿐만 아니라 현지 학교에 대한 정보 부족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며 "일부 학원이 시험문제 유출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지만, 호주에 존재하는 학원은 한국처럼 과열 교육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드니=정원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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