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감독 이재용)'는 바람둥이와 요부가 손을 잡고 27년 동안 정절을 지켜온 열녀를 유린한다는 발칙한 내용의 시대극이다. 풍속화가이자 바람둥이인 조원(배용준), 그리고 그의 첫사랑이자 사촌으로 세도가의 정부인이면서도 색 탐하기라면 조원 못지않은 조씨 부인(이미숙)이 내기를 걸었다. 조원은 열녀문까지 하사 받은 숙부인 정씨(전도연)를 무너뜨리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조씨 부인은 그리하면 자신을 허락할 것이요, 못하면 중이 돼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옷섶 사이로 살짝 비치는 속살처럼 요염하고, 격 있는 농담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두루 갖춘 이 빼어난 18세기식 풍속화의 매력을 묻는다.1.그 대사, 심히 발칙하구나
은근히 도발하고, 그러면서도 거기에 반드시 웃음을 고명처럼 얹어놓은 놓치기 어려운 대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먼저 아쉬운 대로 몇 대목만 청해 듣기로 하자.
"그 아이 이제 열여섯. 얼마나 호기심이 많겠소. 상냥한 말 한마디면 그냥 자리 펴고 누울 때 아니오?"
(조씨 부인은 조원에게 소실로 들어올 소옥을 유혹해 애를 배게 해줄 것을 부탁한다. 소실을 두는 남편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것. 개방적 성 풍속을 암시하는 대사 하나만으로 농염한 극 분위기가 조성된다.)
"호오, 이런 변이 있나. 마음은 권인호에게 있고, 몸은 조원에게 가 있으면서, 시집은 유대감에게 온다…."
(조씨 부인은 소실 될 소옥이가 조원에게 몸을 허락했다고 실토하자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부인의 그릇을 알겠도다.)
2. 말은 '하오체'이되, 정서는 요즘 것 아니더냐
'스캔들'이 매력적인 것은 사극인데도 고서의 케케한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발칙한 대사에 담긴 정서가 '컨템퍼러리',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조씨 부인이 숙부인을 두고 "청상인지, 청승인지…" "문이 열릴런지…. 지금은 벽이 되어 있지 않겠소"라고 말장난을 일삼는 대목은 '정절녀'에 대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엄중한 예의와 정절의 가치를 이처럼 난도질하고 짓밟은 영화는 없었다. 게다가 사촌 동생에게 '줄듯 말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촌 누이라니. "옷 못 입는 것만큼이나 말도 어찌나 지루하던지" 같은 대사는 신세대의 채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하다.
3.조씨 부인, 버선목만 보여주는데 어찌 그리 농염하오?
'날씨도 쾌청하니 오늘은 장미향으로 해볼까.' 이미숙이 뿜어내는 농염미와 카리스마는 세 배우의 호연 가운데서도 두드러진다. 이목구비 하나에도, 대사 하나에도 한껏 무르익은 여인의 매력이 넘친다. 그는 두 젊은 남녀, 그러나 성향은 정반대인 조원과 숙부인의 한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팽팽하게 극을 이끌어간다. 질투의 화신으로서 오랫동안 기억될만한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도망가면 잡아 당기고, 다가오면 뒤로 물러서는 고무줄 같은 조씨 부인.
노련한 연기를 선보인 배용준은 연애 9단의 진면목을 보여주면서 충무로에 입성했다. 체중을 8㎏ 줄여 더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을 하고 나온 그는 외모와는 달리 유머와 능청을 능란하게 보여주며 TV스타의 이미지를 뛰어넘었다. 평소의 활달하고 격정적 면모를 뒤집어 정절녀로 나온 전도연은 조원과의 대조되는 캐릭터를 통해 영화에 긴장감을 부여했다.
4.오호라! 치밀한 이야기가 뭔지 아는 게야
"이 화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다수 품행이 심히 방탕하고 난잡하여 실존을 의심치 않을 수 없다…." '스캔들'의 내레이터는 조선 정조시대, 가상의 춘화집 '조씨추문록'이 실제 있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관객의 호기심을 잡아챈다. 이런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이 있었음을 넌지시 알리며 문을 여는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섹스라는 화두를 붙잡고 있는 이 춘화집의 저자 조원은 윌리엄 수사, 그를 따르는 종 자근노미는 아드소가 아닐까.
'여인 정복 게임'을 통해 유혹과 복수를 씨줄과 날줄처럼 얽는 주제는 스티븐 프리어즈 등 여러 감독이 연출한 바 있는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에서 따왔다. 27년 간 수절해 온 여인의 문을 과연 열어 젖힐 수 있느냐는 내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올해의 화두 가운데 하나인 '바람'의 유행을 '스캔들'은 가장 깊고도 격조 있는 코미디로 집대성했다. 바람에 대한 열망을 미학적 열망으로 승화시키는 감독의 화술이 볼 만하다. '늘 바랐던 것, 그러나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통찰을 갈등과 반전을 통해 잘 보여줬다. 조금 늘어지는 후반부는 옥의 티.
5.너희 눈에도 이것이 명품으로 보이더냐?
이른바 '명품 호러'라 불리는 '장화, 홍련'을 만든 영화사 봄은 이번에도 명품 분위기가 물씬한 소품과 공간 연출로 '명품 사극'을 만들었다. 조씨 부인의 입술 화장 붓 대롱은 비단으로 감쌌고, 심심풀이로 먹는 과자는 꽃보다 곱다.
화면에 보여지는 소품 의상 메이크업 등 모든 비쥬얼 소품의 컨셉을 정한 사람은 '프로덕션 디자이너' 정구호(41)씨. '미니멀리즘' 의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정구호씨는 "영·정조 시대에도 틀을 깨고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명품족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모든 영화 소품을 제작했다. 제작비 50억원 중 20억원이 여기 들어갔다.
화려하고 도도한 성격의 조씨 부인은 당초무늬 자개장과 철화칠을 한 붉은 빛 도자기를 즐기는 화려함으로, 정절녀 숙부인은 푸른색의 단아한 의상으로 성격을 표현했고, 조원은 부채에 달린 작은 장식마저 당대 최고의 명품으로 꾸미는 멋쟁이로 설정했다. 이런 컨셉을 인간문화재급 장인들이 구현해 냄으로써 영화에서는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명품의 분위기가 물씬 흐른다. 정씨는 '정사'를 작업 중이던 5년 여 전부터 이 작품의 컨셉을 잡기 시작, 1년 간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영화에 참여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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