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이 유동적일 때마다 제기돼 온 내각제 개헌론이 신 4당체제 아래서 또 다시 본격 거론되고 있다. 한나라당 신경식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내각제를 공약으로 내세워 국민의 심판을 받자"고 공개리에 주장했다. 이 주장은 우선 한나라당 소장의원들로부터 "대선에 패하자 꼼수로 정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청와대도 '꿈 같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흔들리고, 정국이 불투명 해 질수록 내각제는 더 많은 빈도로 거론될 게 틀림없다. 소속정당을 떠나 상당수 중진들이 내각제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내각제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1960년 4·19혁명으로 탄생한 내각제는 채 1년이 안돼 5·16 군사 쿠데타로 끝을 맺었다. 시운전도 못하고 막을 내린 내각제는 1987년 5공 말기에 정치권에서 되살아 난다. 임기를 마감해야 할 전두환 정권이 내각제를 통해 잔명을 연장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5공정권은 김대중·김영삼 두 김씨가 주도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추진에 위기감을 느껴 내각제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의 분당을 초래한 소위 '이민우 구상'의 요체가 바로 내각제 였다. 두 김씨를 대리해 신민당을 위탁 관리했던 이민우 총재는 대통령직선제 대신 내각제를 주장했다. 이 총재는 구상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정계를 은퇴했고, 5공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해야만 했다.
■ 여소야대로 판가름 난 1988년의 총선은 민정·평민·민주·신공화당이 정립하는 4당 체제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민정·민주·신공화당은 평민당을 고립시킨 3당 합당을 결행한다. 3당 합당의 고리는 바로 내각제 였다. 야3당의 공조를 견디지 못한 노태우 대통령은 권력분점을 내걸고 김영삼·김종필 총재와 연대했다. 하지만 내각제 합의는 비밀각서가 공개되면서 무산됐고, 김영삼씨는 집권에 성공한다. 내각제는 또 1997년 김대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DJP연합'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 합의 역시 물거품이 됐고, 김대중 대통령은 'DJP공조'까지 파기한 채 임기를 마친다.
■ 우리에게 있어 내각제는 4·19혁명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략적 산물이었다. 요란하게 거론만 됐을 뿐 한번도 성사된 적이 없다. 제도의 장단점을 떠나 동기가 불순했던 것이다. 권력을 연장하고 싶거나 혼자 힘으로 정권을 잡기 힘든 정파가 나눠먹기를 제의 했기 때문이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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