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타 존스턴 지음, 노진선 옮김 넥서스 발행·9,900원여성의 몸무게가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인격과 정체성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뚱뚱한 남성도 환영 받지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거식증과 폭식증은 '여성의 병'이다. 여성에게 체중은 취업, 결혼, 대인 관계, 자아 존중 여부 등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때문에 다이어트의 성공은 여성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의 하나로 간주된다. 왜 여성의 굶주림은 사회적 보상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어째서 여성의 몸은 음식과 몸무게가 전투를 벌이는 격전지가 된 것일까. 왜 여성은 마치 성욕을 느낄 때처럼,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식욕을 느낄 때 죄의식을 가져야 할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몸으로 환원되는 존재다. 남성의 정체성, 계급은 몸의 기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여성의 계급성은 그녀가 소유한 돈이나 능력보다는 몸의 상태― 젊은가, 예쁜가―에 좌우된다. 사회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 몰두할 뿐, 여성의 몸이 어떻게 '느껴져야' 하는지는 철저히 무시하고, 때로는 무지하다.
다이어트 중독이 여성에 대한 심리적, 육체적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들이 살 빼기에 자발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이런 '주체적 종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아니타 존스턴의'달빛 아래서의 만찬'(부제 '여성, 은유와 신화를 통해 음식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지다')은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심리적, 정치적 억압이 왜 음식에 대한 집착과 거부로 연결되는가를 추적한다.
이 책은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폭식으로 해결하려는 여성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 때문에 늘 실패했다고 느끼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는 책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음식과 관련된 여성들의 노동과 심리를 다룬 동서고금의 신화, 꿈, 구전 설화에 대한 저자의 여성주의적 통찰과 전복적 해석이 책 읽기의 즐거움을 더한다.
여성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에서는 음식에 매달리는 여성의 상황을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덜 된 신호로 파악하고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격적 결함으로 본다.
저자는 거식증과 폭식증을 정신병으로 규정한 기존의 남성 중심적 시각에 의문을 던지고, 여성의 섭식 장애가 사실은 지극히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서라기보다는 이 문제로 고통 받는 여성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가득 찬, 깊이 있으면서도 쉽고 재미있는 심리 치유서이다.
저자는 폭식과 다이어트 중독의 원인을 현대사회가 여성적 가치를 무시, 여성성과 남성성이 불균형을 이룬 결과라고 본다. 책 제목 '달빛 아래서의 만찬'은 달의 여성적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관계성, 감정과 같은 '여성적'가치보다 성취나 경쟁 같은 '남성적' 가치가 우월한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기 쉽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의 좌절, 분노, 우울증, 학대 당한 경험의 표현을 억압하는데 여성이 자기 고통에 직면하지 못할 때 섭식 장애가 나타난다. 즉, 폭식이나 거식은 언어화하지 못한 여성 문제가 머무는 일종의 도피처이거나 연막이라는 것이다.
먹는 일에 중독되는 것은 감정의 허기와 신체적 허기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혼의 배고픔은 음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달리 이상 식욕이 '과정 중독'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은 알코올 자체에 중독되는 것이지만, 폭식증은 음식이 아니라 '먹는 행위'에 대한 집착이다.
심리, 행동, 감정 영역에서 자기 문제를 돌보지 않은 상태에서, 음식 자체에 집중하는 살 빼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음식이 적이요, 자신의 몸은 늘 배신자가 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자기혐오가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정희진· 성공회대 강사(여성학)
● 나란히 읽기
■ 다이어트의 성 정치(한서설아 지음, 책세상, 2000) 현대 한국 여성들의 다이어트 중독을 '여성의 몸을 통한 남녀 불평등 유지'라는 성별 정치학 시각에서 분석한 수작.
■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페미니즘, 서구문화, 몸(수전 보르도 지음, 박오복 옮김, 또하나의문화, 2003) 여성의 외모 관리, 다이어트, 성형 수술에 관한 페미니즘 철학의 이론적 고전.
■ 몸 숭배와 광기(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여성신문사, 2001) 몸에 대한 미의식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현대인의 몸 집착을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차원에서 비판.
■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크리스티안 노스럽 지음, 강현주 옮김, 한문화, 2000) 여성 질병의 원인은 여성의 사회적 조건에 있다고 주장하는 여성주의 의학, 상담심리학 치유서
■ 마돈나의 이중적 의미― 슬래이브걸과 일상적 性 사회화(프리가 하우그 외 지음, 박영옥 옮김, 인간사랑, 1997)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일상적 훈육을 여성 스스로 성찰한 분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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