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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낭만적 사랑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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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낭만적 사랑과 사회

입력
2003.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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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8,000원"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정이현(31)씨는 이 도발적 문장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첫 문장이다. 이후 발표한 작품들이 편차가 있긴 했지만 등단작의 강한 인상에 힘입어 그는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정이현씨의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그간 발표한 단편소설 8편을 묶은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내추럴 본 쿨 걸'이라고 밝히는데,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내놓은 소설의 품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위태로울 정도로 분방한, 언어를 통통 갖고 노는 품부터가 그렇다. 고무줄이 헐렁하게 늘어나고 누렇게 물이 빠진 팬티 사수하기. 낡은 팬티를 갈아입는 날은 오로지 연애만 하겠다는 사내들이 아니라, 여자 인생 스물 두 해를 걸고 베팅해 볼 만한 남편 감을 찾아냈을 때다. 두번째 만난 날에 스커트 아랫자락에 손을 집어넣는 의대생은 탈락. "너를 사랑해"가 "너랑 자고 싶어"와 동의어인 사내는 아무리 멋진 스포츠카를 갖고 있어도 탈락.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더니 마침내 미국 로스쿨에 다니는 부잣집 막내아들을 만났다. "올 겨울에 결혼해 봄부터는 가정을 이룬 안정된 상태에서 학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차분하게 미래 계획을 들려주는 남자다. 이 남자와의 첫날밤을 위해 흰색 실크 팬티를 샀다. 뻐개지고 찢기는 것 같이 아픈 첫 경험인데, 두 사람이 누웠던 침대 시트는 눈부시게 하얗기만 하다. 그토록 맹렬하게 팬티를 지켜왔건만 이 극적인 첫날밤의 흔적은 아무 것도 없다니! 주차장까지 오는 길에 남자는 손을 잡아주지 않았고 차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 대신 모노그램 캔버스 라인의 루이뷔통 백을 주었다. '짝퉁'이 아닌 '진짜' 명품을 갖는 건 난생 처음이다. 갑자기 솟구친 지독한 불안감이, 뻐근하게 쑤시는 골반보다도 고통스럽다. 어쩌면 이 핸드백, '진짜 짝퉁'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그토록 오랫동안 준비해온 황홀한 낭만도 '진짜 짝퉁' 아닐까.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제다.

평론가 이광호씨는 "정이현씨 소설에는 '나쁜 여자들'이 살고 있다"면서 "이들은 로맨스, 결혼, 가족을 둘러싼 지배적 상징 질서 안에서 기만하고 음모를 꾸미고 위장함으로써 개체의 삶을 보존하고 자기 욕망을 실현할 방법을 모색한다"고 말한다. "개인이 처한 운명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여자, 내면에 침잠함으로써 사랑의 부재를 견디는 상처받은 여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90년대적' 여성소설의 주인공들과 다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오빠와 짜고 가짜 납치극을 벌여 집에서 돈을 뜯어내는 열여섯 살 소녀('소녀시대'), 애인과 전처의 딸을 부추겨 남편들을 죽이는 여자('순수') 등이 그렇다.

5년 사귄 남자와 결혼에 골인하기까지의 '홈 드라마' 한 편. '신경전이 오가는 양가부모 회동,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겨우겨우 맞춘 결혼식 날짜와 장소, 절묘한 합의의 기술이 총동원된 피로연과 예단, 부모님을 모시고 살자는 제안에 발끈해 던진 결별 선언, 첫사랑과의 하룻밤, 양가의 전세비 부담으로 극적으로 이뤄진 결혼식'. 그리고 '남녀 모두 평생의 비밀로 가진, 성 접촉에 의한 바이러스성 질환'이 꼬리처럼 달렸다. 이 꼬리가 바로 '내추럴 본 쿨 걸'이 갖고 있다는 '나름의 진정성'이다. 세상은 가짜다. 짝퉁 세상에 자의식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정씨에게 글쓰기의 욕망이란 한없이 즐겁고 가벼운 것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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