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3일 낮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공산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하조직을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는 내용이었다.이날 밤 10시를 기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4호의 내용은 '민청학련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며, 이에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여 비상군법회의로 처단한다'는 요지였다. 이후 사건은 담화 내용대로 전개됐다.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공산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조총련계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돼 있다"면서 "1,024명이 체포됐고 이 중 253명을 송치하여 1차로 54명을 군사재판에 기소했다"고 밝혔다.
당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명칭은 시위 유인물에서만 존재했다. 소위 '민주 학우 일동'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하지만 유신정권이 시위 주동자와 참가자들에 대해 일괄 소탕을 시도함으로써 민청학련을 만들어 준 셈이 됐다. 교도소와 구치소에 일제히 수감된 학생들은 "전국의 운동권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으니 유신 정권이 큰 일을 했다"고 사건을 꼬집기도 했다. '총연맹'이라 부를 수 있는 집단적인 응집력과 신뢰관계는 군사법정과 교도소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민청학련 때문에 긴급조치가 선포된 게 아니라 긴급조치로 인해 민청학련이 생겨난 것이다.
유신 이후 처음 발생한 73년 '10·2 시위'에서 전국 대학이 일제히 시도했던 74년의 '4·3 데모'까지 6개월 간의 반(反)유신 학생시위에 대해 유신정권이 내린 철퇴였다. 10월 2일 오전 11시 서울대 문리대 강의실 복도에서 학생들이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외치며 다녔다. 교내 4·19 기념탑 앞에는 삽시간에 600∼7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6·3 이래 최대의 숫자였다. 학생들은 '유신 반대 독재 타도'를 외쳤다. 12시 30분쯤 교문 밖에서 대기하던 무장 경찰이 진입했다. 180여명을 마구잡이로 연행했다. 20명이 구속됐고, 23명 제명, 18명 자퇴, 56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4일 법과대, 5일 상과대 시위가 이어지고 10월 하순부터는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됐다. 동맹휴학과 수업거부가 이어졌고, 11월 21일 서울대 교양학부 학생 1,200명은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가두로 나섰다. 다음날 문리대는 방학에 들어갔다. 이러한 양상은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 전국의 주요 대학에서 똑같이 이어졌다. 12월 7일 박 대통령은 민관식 문교장관을 불러 10월 2일 이후의 모든 구속 학생들을 석방하고 처벌을 백지화 하라고 지시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안양로(安亮老·54·서울대 정치학과 68학번·현 한강선원 원장)씨의 회고. "69년 3선개헌 반대로 군에 끌려갔다가 73년 초 복학했다. 전남대 '함성지 사건'의 주모자가 징역15년을 구형 받았다. '돌 한 번 던지면 15년'이란 말이 유행했다. 대학가는 얼음 속에 갇혔다. 2학기 들어 69년 입대했던 학생들과 71년 위수령으로 잠적했던 학생들이 속속 학교에 나타났다. 우리는 돈암동 석굴암이란 주점을 아지트로 삼았다. 황인성(黃寅成·독문과 71학번·현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무총장) 등 재학생들이 주도한 10·2 시위를 보면서 새로운 차원의 학생운동 방안을 논의했다. 11월 중순부터 '석굴암 회합'이 정례화했다. 12·7 조치로 석방되는 학생들의 모습이 TIME지 표지 사진으로 실렸다. 학생들은 유신을 넘어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반면 정부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집무실 책상 위에 시위 주동자 명단을 꽂아놓고 매일 중정부장으로부터 검거 상황을 보고 받았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서중석(徐仲錫·국사학과 67학번·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유인태(柳寅泰·사회학과 68학번·현 청와대 정무수석) 이철(李哲·사회학과 69학번·전 국회의원) 나병식(羅炳湜·국사학과 70학번·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등 이른바 서울대 민청학련 '4인방'의 모임이 정례화 했다. 이들은 긴급조치 1·2호 발표 이틀 후인 1월 10일 첫 모임을 가졌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전국 동시 다발적인 데모를 벌이기로 했다. 임무를 분담하고 후배 그룹과 수직적 연계도 체크했다. 서울대는 이철, 서울대 이외의 전국 대학은 유인태, 재야 인사는 서중석, 기독교 단체는 나병식으로 정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당국은 '3·4월 위기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유인태씨의 증언(천주교인권위원회 엮음 '사법살인'에서). "나중에 조사 받을 때 안 일이지만 당국은 우리를 '키워서 잡으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우리는 대규모 데모를 4월 초로 잡고 선도투쟁을 시도했다. 3월 10일 한신대 투쟁은 성공하지 못했다. 중순 경 지방에서 하기로 하자 경북대에서 앞장서겠다고 했다. 21일 시위는 탄압이 너무 강경해 200여명 밖에 참가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하기로 하고 서강대(3월 28일), 연세대(4월 1일)에 이어 4월 3일 일제히 일어서기로 했다. 서강대 시위 직후 서중석 등 학생운동의 리더 수십명이 일제히 잡혀갔다. 검거 선풍 속에서 4·3 데모가 터졌다. 오전 11시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고려대 서울여대 등에서 일제히 시작했다. 미리 교내에 들어와 감시하고 있던 사복경찰과 시위 학생들 사이에 곳곳에서 각목전이 벌어졌다. 교문 밖 진출은 여의치 않았다. 저녁 무렵 이대생 40여명이 청계천에서 산발 시위를 하는데 그쳤다. 시청앞과 명동 광화문 등에 경찰과 기관원은 물론 향토예비군까지 동원돼 있었다. 오후 10시를 기해 긴급조치 4호가 발효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10·2시위 주동 황인성씨
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갔다. 나의 '첫 경험'이었다. 당시 KSCF 학생사회개발단 단장을 맡아 부활절 새벽에 신도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준 것 때문이었다. 1달 정도 갇혀 있었다. 직후 김대중씨 납치 사건(8월 17일)이 터졌다. 일본 문화원에 가서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유신 정권의 부도덕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10·2 시위'를 계획했다. 많은 학생들이 잡혀갔으나 지도부는 모두 피신했다. 언론은 침묵했다. 얼마 후 경북대에서 데모를 이었다. 한 학생이 평양방송을 통해 서울대에서 데모가 있었음을 알고 그 내용을 대자보에 써 붙였던 것이다. 이어 모든 대학에서 데모가 일어났고, 심지어 고등학교에까지 번졌다. 10월 중순 10·2 시위 주동자들이 검거됐다.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나와보니 이철 유인태 서중석 나병식 안양로 등 선배들이 이미 그룹을 형성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반유신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국은 전력절약을 이유로 12월 4일 고교에까지 조기방학을 지시했다.
우리는 선배그룹과 합류했다. 다방과 친구·선배들의 하숙집 등을 전전하며 역할을 분담하고 대책 등을 논의했다. 1월 8일 긴급조치(1·2호)가 발표됐다. 감시가 조여옴을 느낄 수 있었다. 보안을 유지하고 토론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합숙을 시작했다. 등록금을 털어 미아리에 월세 5,000원 짜리 방을 얻었다. 목소리를 죽이며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개학 이후 4·3 데모를 준비했다. 4·19나 6·3 때처럼 하기로 하고 당시의 자료를 분석, 가두시위 진출 방향 등에 대해 도상연습도 했다. 동일한 유인물을 만들어 전국의 각 대학에 보내기로 했다. 4·3 데모 2∼3일 전 본격적으로 유인물을 제작했다.
전국의 학생들이 연대감을 갖도록 '주최자'를 만들기로 했다. 갖가지 안이 나왔다. 나는 전국민주대학생연맹이란 안을 냈다. 당시 고교 쪽 연결 임무도 맡고 있던 이철 선배가 청년학생으로 하자고 했다. 결국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이란 이름이 유인물에 들어갔다. 유인물 기획과 제작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시 민청학련이란 말을 몰랐다. 정부가 긴급조치 4호로 홍보를 대신해 주었다.
4월 1일과 2일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 내용을 전국의 대학 대표들에게 보냈다. 내용을 받은 그 쪽 책임자가 각기 유인물을 등사해 3일 일제히 뿌리기로 했다. 3일 발표된 긴급조치 4호가 민청학련을 겨냥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의 행동들을 상당히 가까이서 꿰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검거돼 조사를 받는 중에 중정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4·3 제주폭동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 "해방 후의 민청 혹은 민민청과 관련된 것 아니냐"고 다그치며 우리를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고 갔다. 당시 중정 6국장이던 이 모씨는 나를 검찰에 송치하면서 "이제야 한강에서 빨간 물 청소 다 했다. 팔당까지 완전히 깨끗해 졌다"며 기뻐하더라. 75년 2월 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승리로 이끈 정부는 학생 신분의 피의자를 모두 풀어 주었다.
4·3 데모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날 낮 고대 근방에서 동지들과 "사전에 정보가 샜다. 다시 연락하자"는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후배의 집으로 피하려고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비상국무회의 등 대통령 담화를 들었다. 그 전부터 사실상 당국의 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공개적으로 수배자 명단에 들어가니 다닐 데나 갈 곳이 없었다. 4월 중순쯤이었다. 10·2 시위 후 며칠간 숨어 있었던 연희동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린다 존스)의 집으로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접 연락이 되서 근처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안경을 쓰는 등 나름대로 변장을 하고 오전 10시에 약속 장소로 갔다. 자리에 앉았더니 음악을 틀던 직원이 다가와 갑자기 권총을 꺼내 겨누었다. 주변에 있던 손님들도 나에게 달려들었다. 모두가 수사관이었던 것이다.
원래 민청학련은 우리가 전국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유인물을 만들기 위한 명칭이었다. 당국은 민청학련이란 말을 제대로 몰랐거나 핵심 멤버가 아니었던 학생 등 수백명을 감옥에 모아 차체적으로 MT를 시켜준 꼴이 됐다. 70년대 중·후반 민주화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키워낸 데는 중앙정보부의 공(功)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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