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가 누렇게 빛이 바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몽상의 시학'이란 산문집인데 발행 연도가 1978년, 정가가 1,500원으로 적혀 있었다. 벌써 25년 전. 당시의 기억이 흑백 슬라이드처럼 한 장면, 한 장면씩 아스라이 떠오른다.그때 난 중학교를 막 졸업한 사춘기 소녀였다. 경북 경주 시내의 어느 책방을 돌아다니다가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바로 '몽상의 시학'이었다. 어느 외국 작가가 인생에 대해 쓴 산문집이었다. 책을 밤새워 탐독했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던 시절,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준 사람은 언니였다.
당시 우리 집은 경북 경주 근처의 어느 시골에 있었는데, 비가 오면 함석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런 날에는 언니와 함께 책을 읽곤 했다. 나는 궁금증이 생기면 "이건 뭐야?" "왜 그래?"하면서 언니에게 많은 질문을 해댔다. 그래도 언니는 귀찮아 하지 않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언니에게 온 러브레터를 몰래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언니의 일기장은 사춘기에 이른 나의 호기심을 대리 만족시켜 주었다. 언니는 얼굴이 예뻤고 남학생들로부터 러브레터를 자주 받았다. 언니의 방에 내걸린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글귀는 지금도 생생하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슬픔과 노여움을 자주 겪는다. 그럴 때마다 언니 방에 걸린 시를 생각한다.
언니는 이제 중년이 됐고 이마에 주름살이 생겼다. 그렇게 예쁘던 얼굴도 세월만은 이길 수 없었나 보다. 가끔씩 나는 인간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시골 고향의 흙 냄새처럼 그 시절 언니의 모습이 보고 싶다. 같은 경험을 공유한 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언니는 결혼해서 아들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책장의 묵은 먼지를 깨끗이 털고 방안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바람이 살랑이면서 들어온다. 다시 한번 '몽상의 시학'을 읽는다.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던 내용이 이제는 "아, 그렇군"하고 가슴에 들어온다. 누런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언니의 부드러운 손을 만지는 기분이다. 이제는 나와 같이 늙어가는 언니, 잘 지내고 있겠지?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반기는 언니에게 오랜만에 전화라도 해야겠다.
/최순자·경북 경주시 성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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