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일본에서 '정년이혼'이란 말이 유행했다.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참던 아내가 자식이 다 커서 독립하고 남편이 정년 퇴직으로 퇴직금을 받았을 때를 노려 결행하는 이혼을 가리킨다.
정년이혼의 위기에 몰린 남편은 '누레오치바'라고 불렀다. 비에 젖은 낙엽이란 뜻이다.
사회에서 불러주지도 않고 아내가 없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비에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하는 남편의 모습을 잘 그려낸 말이다.
요즘 일본에서는 '사후(死後) 이혼'이란 말이 새로 나왔다.
남편의 장례까지 다 치러주고 여생을 마친 아내가 남편과는 다른 무덤에 들어가거나,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경우 자기만 들어갈 무덤을 미리 준비해 갈라서는 부부 별묘(別墓)형 이혼을 뜻한다. 사후이혼한 아내의 유언장 중에는 "남편과는 절대 안되고 기르던 고양이와 묻어달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내도 남편 집안의 가족 납골묘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일본에서 아내가 혼자 묘를 쓴다는 것은 남편은 물론이고 모든 가족과의 연을 끊어버리고 개인으로서의 '나'를 선언하는 의미가 있다.
용기가 없거나 다른 사정이 있어 정년이혼을 결행하지는 못하고 살아서 아내의 모든 의무를 끝마친 뒤 죽음을 맞으며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장엄함이나 처연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후이혼을 희망하는 아내들 때문에 묘지 사정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대개 시골이나 도시 근교에 있는 가족 납골묘와는 이미 절연했고 가까웠던 친구, 유달리 정이 두터웠던 자식이나 찾아줄 것이기 때문에 찾아오기 편하게 도심에 재개발하는 작은 납골묘가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아예 한줌 재를 산이나 바다에 산골(散骨)하는 '자연장(葬)'을 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나는 정년이혼이나 사후이혼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남편들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신 윤 석 도쿄 특파원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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