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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멸 풀무꾼 원경선 <10> 풀무원공동체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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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멸 풀무꾼 원경선 <10> 풀무원공동체의 출발

입력
2003.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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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부천 소사에 남은 1만여평의 땅에서 풀무원 공동체는 시작됐다. 그러나 풀무원이라는 간판을 따로 내건 것은 아니었다. 갈 곳없는 이들이 들어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사는 방식을 배워나가면 충분했기 때문에 간판 같은 형식은 필요없었다. 못쓰는 쇠를 녹여 낫이나 칼을 만들 때 사용하는 풀무. 다만 세상에 버려진 이들도 풀무의 도움만 있다면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풀무원은 출발했다.그런데 풀무라는 명칭은 이미 당시에 다른 데서 사용하던 것을 내가 빌어 쓴 것이다. 당시 충남 홍성의 풀무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교회운동을 펼치던 이찬갑 선생과 주옥로 선생이 풀무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배울 형편이 안되는 농촌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함석헌(咸錫憲)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두 분은 교회 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공동체를 시작할 무렵 풀무골을 찾은 나는 주 선생에게 "풀무라는 이름이 제가 하려는 공동체의 의미에 너무 적합한데 빌어다 쓸 수 있을까요"라고 넌지시 물었다. 주 선생은 "좋은 데 쓴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습니까"라며 그 자리에서 응낙해 줬다. 지금이라면 저작권이다 뭐다 해서 시끄러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 뒤 나는 풀무학원의 이사로 학교운영에 간여하게 됐다.

풀무원 농장은 밭과 임야를 합쳐 1만평 정도 됐다. 6채의 집 앞으로는 넓게 밭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야산이 둘러싼 모습이었다. 밭에는 포도와 복숭아 등의 과수를 심고 콩과 고추 같은 농작물도 심었다. 논도 있었지만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다. 축사를 만들어 소나 돼지, 염소 등의 가축도 키웠다. 농장규모가 꽤 컸기 때문에 사실 나 혼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굶주림없는 세상만들기가 풀무원공동체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전쟁고아나 노인뿐 아니라 멀쩡한 청장년까지 기아상태로 빠뜨렸기 때문에 기아해방 없이는 바른 삶에 대한 교육도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굶주림의 고통은 어린시절과 서울에서 보낸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내 인생 고비고비마다에 나타났던 몽마(夢魔)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시책 또한 먹는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일도 않고 노는 사람까지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바른 삶에 대한 교육은 둘째 치고라도 그런 식의 구호라면 농장유지도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고 함께 먹자'는 원칙을 세웠다. 먹기 위한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나의 기아해결 방안이다. 이런 기본원칙에 교육과 신앙생활이 더해졌다.

공동체 생활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족회의였다. 대여섯 가족이 함께 모여 살다보니 사소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예배를 겸해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여기서는 농장운영부터 가족들간에 풀리지 않는 오해와 불신까지 갖가지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졌다. 가족회의는 지금의 양주로 옮겨온 뒤에도 계속 이어져 풀무원의 전통처럼 됐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추어지자 전국 곳곳에서 함께 살아보겠다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쟁고아나 거지, 불량배, 심지어 경찰의 눈을 피해 들어온 범죄자에 나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환자취급을 받는 '미감아'들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적응은 쉽지 않아 한달을 못채우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신념을 갖고 들어온 사람들은 2∼3년은 기본이고 7∼8년씩 함께 지낸 이들도 적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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