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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주기 환율전쟁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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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주기 환율전쟁史

입력
2003.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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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달러와 엔, 서방 통화와 아시아 통화 간에 글로벌 파장을 야기시키는 '환율전쟁'은 1980년대 이래 10년 주기로 반복되고 있는데 이번이 세번째다.지난 두 차례의 갈등 역시 통화 기축국인 미국이 주도했고, 일본을 포함한 서방선진국 간 절충을 통해 새로운 달러 가치의 추세를 구축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95년 엔·달러 환율의 급변동이 아시아 금융위기를 촉발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처럼 강대국 간의 환율전쟁은 특히 아시아나 남미의 '주변국'들에게 적지않은 시련을 안겨줬다.

1985년 플라자합의 전후

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뒤 재정·무역에 걸쳐 '쌍둥이 적자'가 급격히 불어나자 미국은 대일 무역적자(85년 429억달러)를 줄이고, 일본 자본의 유입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달러 강세를 선호하는 공화당의 전통적 정책을 수정했다.

엔화 가치가 올라가면 국제시장에서 일제 상품의 가격이 올라 수입이 줄 것이고, 지나친 통화가치 상승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이 저금리 정책을 쓰면 일본 내 자금의 해외유출(미국 내 유입)이 활성화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일본은 저항하다 결국 미국의 압력을 수용해 85년 9월22일 미·영·불·독·일 등 G5 재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회의에서 시장 개입을 통해 엔 가치를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87년 루브르합의를 통해 일시적으로 달러 강세를 유도하기도 했지만 플라자합의 당시 260엔 대를 기록했던 달러는 95년까지 약 10년 간에 걸쳐 80엔 대까지 하락했다.

플라자합의로 일본 부동산의 거품을 빠지게 한 저금리기조가 정착됐고, 이자가 싼 막대한 일본 자금이 고수익을 좇아 동남아 직접투자에 나서게 됐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를 포함해 일본과 수출 경쟁을 벌였던 아시아 신흥시장의 수출과 설비투자를 통한 고도성장이 가능했다.

1995년 워싱턴 G7 회담 전후

클린턴 행정부 출범 후 94년 말을 기점으로 달러 약세가 더욱 가속화했다. 전임 조지 부시 행정부 때 다시 급증한 '쌍둥이 적자'로 달러의 속락세가 이어진데다, 미일자동차협상에서 일본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기존의 '엔고정책'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시장의 인식 때문이었다.

달러 약세가 가속화하자 평가손을 감당하기 싫은 미국 내 해외자본의 유출이 일어났고, 이를 잡기 위해 94년부터 95년초까지 1년 사이에 연방기금금리를 3%에서 6%까지 급격히 높이다 보니, 채권시장 침체는 물론 걸프전 이후 모처럼 활황세를 맞은 미국 경기가 냉각 우려에 직면했다.

이 때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이 도출한 묘책은 이른바 '강달러정책(Strong Dollar Policy)이었다. 가뜩이나 통화가치 상승으로 고통 받던 일본과 유럽연합(EU) 역시 이 정책을 적극 지지해 95년 4월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회담에서 G7은 '달러 가치의 질서 정연한 반전'을 골자로 한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이 합의 이후 시작된 달러 강세로 인해 FRB는 금리를 인하할 수 있었다. 경기 사이클에 앞선 선제적 금리조정으로 인해 미국의 '인플레이션 없는 지속 성장'이 계속됐다. 그러나 값싼 국제자금을 흥청망청 써가며 성장의 신기루를 던 아시아 제국은 갑자기 닥친 자금 부족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97년의 비극을 맞았다.

/장인철기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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