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가을 강. 그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움직임조차 차갑게 들려오는 적적한 계절. 한 사람이 가을 강에 배를 띄우고, 비파를 안았다. 뱃전에 앉아 비파를 끌어안고 앉은 사람을 바라보자니, 그이가 바라다보는 강물 위로 깊어가는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서늘한 기분이 든다.이 무렵쯤 강을 찾는 사람 중엔 당(唐)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악양루에 올라지었다는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 의 가을이 먼저 생각나기도 하고, 또 그 중에 풍류를 즐기는 이는 서도 명기(名妓)들이 유장하고도 서늘하게 부르는 ‘관산융마’의 첫 구절, ‘추강 적막 어룡냉- 秋江寂寞魚龍冷’의 가락이 가슴에 사무치기도 할 것이다.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
비파는 우리 눈에 익숙한 악기다. 신라의 토우(土偶) 중에도 비파 연주상이 있고, 아름다운 천인(天人)이 새겨진 신라 범종에도 비파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진 것만 보더라도 비파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있었던 악기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친근한 비파, “그 소리는 어떤 것이었더라”하는 생각이 들면 좀 난감해진다. 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비파의 연주 전승이 단절된 오늘날은 그 비파 소리가 ‘특별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쓸쓸한 생각을 감출 길 없다.
비파는 악기를 연주할 때 오른 손을 앞으로 밀면 ‘비(琵)’라는 소리가 나고, 손을 끌어당기면 ‘파(琶)’라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옛 시인들은 비파의 현을 뜯는 소리가 ‘비단을 찢는 것 같다’거니, 상심한 마음을 울리는 소리 같다고 표현한 이가 많다. 특히 당대의 거장 백낙천이 지은 ‘비파행(琵琶行)’이라고 하는 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비파 소리의 이미지는 ‘처연하고도 슬픈 소리’로 통했다.
‘어느 사연 많은 여인이 비파를 안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비파 줄을 가벼이 눌렀다 비벼 뜯고, 퉁기며 연주하는데, 굵은 줄은 소란스런 소나기처럼, 가는 줄은 가냘픈 속삭임처럼 변화무쌍하게 이어져, 그 소리는 얼음 밑을 흐르는 샘물처럼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남모를 회환을 불러일으킨다’는 백낙천의 시 ‘비파행’ 은 그대로 비파 음악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백낙천 이후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 한 노인이 강에 배를 띄우고 비파를 연주하는 이경윤의 ‘주상탄금도’을 보면서 자연히 그 노인의 마음 갈피에 관심이 쏠린다.
그림 속의 계절이 가을일 것이라거나, 그림 속 노인이 비록 세상 욕심 다 버리고 백구(白鷗)와 벗이 되겠노라 여유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마음속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생에 대한 울분도 남아 있고, 찾는 이 없는 가을의 적막함도 사무치겠거니… 하는 생각 이 먼저 든다. 가을을 쓸쓸한 마음으로 맞는 이의 음악, 비파소리 이미지를 담은 이경윤의 ‘주상탄금도’에서 가을을 느낀다.
/송혜진(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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